(책 글) “조지 휘트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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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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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기를 뒤흔든 전도자


조지 휘트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


저자; J. C. 라일

 

<지은이 소개/ J. C. 라일>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위대한 복음주의자중 한 사람. 1816년 영국 맥클즈필드에서 태어나, 이튼 칼리지를 거쳐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를 졸업했다. 39년 동안 시골 교구에서 봉사했으며, 1880년부터 20년 동안 리버풀(Liverpool) 최초의 주교로 일하다가 1900년 85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침례교 설교자 스펄전(C. H. Spurgeon)은 그를 “영국 국교회 내에서 가장 고귀한 인물”이라고 불렀다. 당대에 위대한 설교자로 존경받았을 뿐 아니라 저명하고 유능한 논문 집필자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수많은 논문과 설교가 출간되었다. 일생 동안 약 20권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거룩>(은성)은 마틴 로이드 존즈가 “위대한 책”이라고 평한 바 있다.

 

<옮긴이 소개/ 홍종락>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Habitat for Humanity Korea)에서 간사로 4년간 활동했다. 지금은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며, 재미있는 동화를 써서 딸아이에게 읽어주는 것이 꿈이다. 지금까지 <성령을 아는 지식>(홍성사), <대학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와플 같은 남자 스파게티 같은 여자>(이상 생명의 말씀사), <오페라의 유령>(국일미디어) 외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차례>


추천사. 마틴 로이드 존즈
  1. 조지 휘트필드의 생애와 사역 (J. C. 라일)


 
  1. 휘트필드의 설교 명편들

(1) 은혜의 노정(路程) (렘 6:14)

(2) 믿는 자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신 그리스도 고전 1:30

(3) 주님 우리의 의 (렘 23:6)

(4)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창 3:15)

(5)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창 5:24)

(6) 선한 목자-고별 설교 (요 10:27,28)

 
  1. 휘트필드가 전한 복음 (R. 엘리엇)


 

<소개글>


18세기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the Evangelical Awakening)'의 단연 돋보이는 인물 조지 휘트필드. 그는 사도의 권위를 갖춘 진정한 복음전도사였으며,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최고의 설교자이자 연사였다. 본 서는 조지 휘트필드의 생애와 그의 설교 명편들을 담은 특별한 책이다.

 

추천사


 

이 책의 추천사를 의뢰받고 조지 휘트필드와 라일 대주교 같은 분들과 지면을 통해서나마 인연을 맺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지난 50년간 우리 교회사에서 조지 휘트필드를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 온 일보다 더 슬프고 우려할 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존 웨슬리가 얼마나 많은 주목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200년 전, 휘트필드는 최고의 설교자로 존경받았습니다. 이제 그를 다시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때입니다.

18세기,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the Evangelical Awakening, 주로 1720-40년대 영국의 아메리카 여러 식민주에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 가운데 조지 휘트필드는 단언 돋보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도의 권위를 갖춘 진정한 복음전도사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움 그 자체였고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초인적인 활동을 벌였습니다.

게다가 18세기 최고의 설교자이자 연사였던 휘트필드는 거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야 비할 수 없겠지만 이러한 위인의 생애를 읽고 육성을 들어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라일 대주교의 글은 탁월합니다. 이제까지 나온 휘트필드에 대한 평가 가운데서도 감히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라일 대주교의 이 유명한 글을 이런 식으로 다시 접하게 되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 책에는 라일 대주교가 강조했던 바들을 잘 보여 주는, 위대한 설교자 휘트필드의 대표적인 설교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토록 능력 있게 쓰셨던 휘트필드의 생애와 설교들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독자들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200년 전에 주권적인 은혜로 베푸셨던 대부흥을 우리 세대에도 주시기를 갈망하고 기도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소서.”

마틴 로이드 존스

 
  1. 조지 휘트필드의 생애와 사역


 

1

100년 전, 영국에서 신앙부흥을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경의를 표해야 할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그들의 삶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특별히 어떤 분야들에서 활동했는가? 나는 지금부터 두 장에 걸쳐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부분적인 답이나마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주석 1: 휘트필드에 대한 이 두 장은 1875년에 출판된 라일 대주교의 <18세기의 기독교 지도자>(Christian Leaders of the Last Century)에 실렸던 글이다. 그 책의 일부가 여러 출판사에서 <5인의 기독교 지도자>(Five Christian Leaders)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혹여 이런 질문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안된 일이다. 분명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실 때 도구로 사용하신 사람들은 세심하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따라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양각나팔(수 6:20)이나 시스라를 죽인 망치와 말뚝(삿 4:21), 기드온의 횃불과 나팔(삿 7:16-23), 다윗의 물매와 돌(삼상 17:49)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냉랭하고 열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만큼은 18세기 영국의 복음전도자들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싶어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살펴볼 첫 번째 인물은 조지 휘트필드이다. 출생연도로 따진다면야 첫 번째라 할 수 없지만, 업적으로 볼 때 나는 주저 없이 휘트필드를 첫 번째로 꼽는다. 100년 전에 활약했던 영적인 선각자들 가운데 휘트필드만큼 시대의 요구를 빨리 파악한 사람도 없었고 진취적으로 복음 전도라는 위대한 사역에 앞장선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내가 휘트필드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거론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일 수밖에.

휘트필드는 1714년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개신교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이름들이 그가 태어난 이 유서 깊은 주청 소재지 글로스터와 관련이 있다. 최초이자 최고의 영어성경번역가 중 한 사람인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이 글로스터 출신이었으며, 글로스터의 주교였던 위대한 영국의 종교개혁가 후퍼(John Hooper)는 메리 여왕의 치세에 자신의 성당이 보이는 곳에서 화형을 당했다. 또한 17세기 글로스터의 주교였던 마일즈 스미스(Miles Smith)는 당시 로드(William Laud; 1573-1645) 대주교가 교회의식들을 로마 가톨릭화하는 데 항의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사실 그는 개신교 정신에 우직하리만큼 충실했다. 1616년, 로드 대주교가 성당의 성찬대를 동편 끝으로 옮기고 처음으로 ‘제단처럼’ 배치했을 때, 스미스 주교는 마음이 상한 나머지 그날 이후 죽는 날까지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따라서 글로스터 같은 곳에는 신앙의 위인들이 드린 많은 기도 덕분에 풍성한 유산이 있게 마련이다. 후퍼가 설교하고 기도했던 도시, 열정적인 마일즈 스미스가 저항했던 바로 그 도시에서 영국이 낳은 최고의 복음전도자가 태어났던 것이다.

유명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휘트필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그의 주변에는 출세에 도움이 될 만한 부자나 귀족들이 전혀 없었다. 휘트필드의 어머니 역시 글로스터에서 벨 인이라는 여인숙필드의 출세에 도움을 줄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그 여인숙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우리의 주인공인 위대한 영국의 설교자뿐 아니라 유명한 엑세터(Exeter)의 주교 헨리 필폿(Henry Philpot)의 출생지로도 유명하다.

휘트필드의 말에 따르면, 그의 유년기는 종교적인 것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물론 소년들이 대개가 그렇듯이 그도 가끔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불현듯 경건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성품은 오로지 그들의 습관이나 취미로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상습적인 거짓말쟁이에다 음담패설과 어리석은 농담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한다. 게다가 안식일을 어겼으며 극장에 갔고 카드놀이를 했으며 로맨스 소설을 읽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휘트필드는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글로스터에 있는 무료 문법학교(Free Grammar School)를 열다섯 살까지 다녔던 것이다. 학교성적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공부를 꽤나 열심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 년 반이라는 공백 기간을 극복하고 열여덟 살에 대학입학 자격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편지를 쓸 때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는 습득하기 어려운 라틴어 문장을 인용문의 형태로 자주 사용하곤 했다. 이 밖에 그의 학창시절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라고는, 당시에 웅변술과 기억력이 뛰어나 학교 대표로 뽑혀 해마다 학교를 방문했던 글로스터 시의원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어 휘트필드는 학교를 떠났고 라틴어와 헬라어 공부도 잠시 동안 그만두었던 것 같다. 아마도 어머니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서 그가 여인숙 일을 도우며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으리라. 그는 벨 인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나는 파란 앞치마를 두르고 컵을 닦고 방 청소를 했다. 한마디로 나는 일 년 반 동안 급사나 다름없었다."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여인숙 사업을 정리하자 휘트필드도 급사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학교 동기를 만나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려던 예전의 희망이 되살아난 그는 문법학교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글로스터 문법학교가 옥스퍼드 펨브록 칼리지에서 열었던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그에게는 대학생 친구들도 몇몇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몇 차례의 행운 끝에 열여덟 살에 펨브록의 근로장학생으로 옥스퍼드에 입학했다.(주석2 : 1865년 6월, 우연히 옥스퍼드에 방문했다. 나는 펨브록 칼리지에서 휘트필드가 옥스퍼드 시절에 머물렀던 방들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관리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하면서 대신에 존슨 박사(Dr. Johnson)가 사용했던 방을 가르쳐 주었다. 존슨은 휘트필드가 입학하기 전에 옥스퍼드를 졸업했다.)옥스퍼드에 다니던 시절은 휘트필드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대학에 입학하기 전 2,3년 동안 그에게는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펨브록 칼리지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이러한 확신이 명확한 기독교 신앙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휘트필드는 가능한 한 모든 공예배에 성실하게 참석했다. 여가 시간은 교도소를 방문해서 죄수들에게 글을 읽어 주는 등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며 보냈다.

그러면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Charles Wesley), 그리고 마음이 맞는 소규모의 젊은이 집단과 사귀게 되었다. 그 중에는 <테론과 아스파시오>(Theron and Aspasio)를 쓴 제임스 허비(James Hervey)도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생활을 엄격하게 감독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처음으로 '감리교도'(監理敎徒, Methodist)라고 불렀다. 한때 휘트필드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나 카스타누자(Castanuza)의 <영적 전투>(Spiritual Combat) 같은 책들을 탐독했고, 반(半)천주교인이나 금욕주의자, 혹은 신비주의자라고 불릴 만큼 신앙을 오로지 자기부인으로만 여기는 위험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언제나 가장 험한 음식만 골라 먹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 내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에 기름이라도 바르면 회개가 헛된 것이 된다고 생각한데다 모 장갑을 끼고 기운 옷을 입고 더러운 신발을 신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먹거나 마시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한 금욕적인 생활을 계속 고집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내 영성생활이 크게 진전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휘트필드가 이러한 무지에서 서서히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경험이 풍부한 몇몇 그리스도인들의 조언과, 스쿠걸(Henry Scougal)의 <인간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로(William Law; 1686-1761, 영국의 신비주의자)의 <중대한 부르심>(Serious Call),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불신자에 대한 부르심>(Call to the Unconverted), 앨런(Alleine)의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경고>(Alarm to Unconverted Sinners), 매튜 헨리(Matthew Henry)의 <성경주석>(Commentary) 같은 책들을 읽은 덕분이었다. 무엇보다도 휘트필드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 마음이 점점 열리고 넓어지면서 다른 책들은 제쳐 둔 채 무릎 꿇고 성경을 읽어 나갔으며 가능한 한 성경에 있는 모든 구절과 단어를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참으로 내 영혼의 음식이자 음료였다. 나는 날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새 생명과 빛과 능력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인간이 쓴 다른 어떤 글에서도 얻을 수 없는 진정한 지식을 얻었다."

휘트필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깨달은 후 다시는 금욕주의와 율법주의나 신비주의,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관한 이상한 견해들에 빠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신앙에 대한 극심한 갈등 끝에 갖게 된 이 같은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교리들은 그의 심령에 깊이 뿌리내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휘트필드는 옥스퍼드의 감리교도 중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또한 그 누구보다도 확고하게 그것을 끝까지 지켜 나갔다.

1736년 삼위일체 축일, 스물두 살 젊은 청년 휘트필드는 글로스터의 벤슨 주교에게 부제 안수를 받았다(영국 성공회 성직에는 주교[主敎:Bishop], 사제[司祭:Priest],부제[副祭:Deacon] 세 계급이 있다). 자청한 게 아니라 셀원 부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휘트필드의 성품을 전해들은 벤슨 주교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책을 사 보라고 5기니를 주고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부제 안수를 해 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이런 뜻밖의 제안을 받을 당시 휘트필드는 자신이 과연 사역에 적합한 사람인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내 주교의 제안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더 이상 버티면 하나님께 대항해 싸우는 꼴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휘트필드가 맨 처음 설교를 한 곳은 그가 태어난 도시인 글로스터의 성(聖)메리르크립트 교회였다. 그때 상황에 대해서는 휘트필드의 설명을 직접 듣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지난주일 오후, 내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처음으로 참석했던 성메리르크립트 교회에서 내 생애 최초로 설교를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나에 대한 호기심으로 많은 청중들이 모였다. 솔직히 그들을 보자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어 오히려 편안했다. 게다가 어릴 때 학교에서 했던 대중연설이나 대학에 다닐 때 죄수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경험들이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당당할 수 있었다. 설교 도중 내 속에 불이 붙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새파랗게 젊은데다가 청중 가운데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알아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권위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조롱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누군가 내 첫번째 설교 때문에 열다섯 명이 미쳤다고 주교님에게 불평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덕망 있는 주교님은 그런 미친 상태라면 다음 주일까지 지속되기를 바라셨다."

부제 안수를 받자마자 또다시 휘트필드는 옥스퍼드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런던의 타워 교회에서 두 달간 임시로 종무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성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동안에도 이즐링턴 교회, 비숏스케이트 교회, 성(聖)던스탄 교회, 성(聖)마가렛 교회, 웨스트민스터 교회, 칩사이드에 있는 보우 교회 등 런던의 여러 교회에서 계속 설교를 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휘트필드는 설교자로서는 전무후무한 인기를 얻었다. 평일이건 주일이건 그가 설교하는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고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처럼 비범한 음성과 몸짓을 구사하며 도저히 즉흥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탁월한 달변으로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등장한 것은, 당시 런던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회중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 후 휘트필드는 런던을 떠나 베이싱스토크 근처 햄프셔의 조그마한 시골 교구인 더머에서 두 달간 사역했다. 그곳은 전혀 새로운 활동 영역이었고, 주위에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거기 생활에 적응했고, 뒷날에 그 시절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곳에 있을 때 웨슬리 형제가 조지아 식민주 서배너 근처에 있는 고아원을 맡아 달라고 거듭 요청해 왔는데, 마침내 그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글로스터 주 브리스톨과 스톤하우스에서 몇 개월간 설교한 뒤 휘트필드는 1737년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일 년 정도 머물렀다. 이때부터 고아원 일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 였다고 말할수 있다. 사실 고아원 일에 뛰어들었을 때 의도야 좋았지만, 그 일에 개입한 것이 과연 지혜로운 결정이었는지 극히 의심스럽다. 그 일은 죽는 날까지 휘트필드에게 많은 염려와 부담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1738년 후반, 휘트필드는 조지아에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벤슨주교에게 사제 안수도 받고 고아원을 운영하기 위한 기금도 모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입지가 조지아 식민 주로 떠나기 전과는 사뭇 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성직자 대부분이 그를 적대시했고 열광주의자에다 광신자로까지 취급했다. 특히 그들은 세례교인들에게도 중생이 필요하다는 휘트필드의 교리를 너무도 괘씸하게 여겼다! 그러다 보니 휘트필드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강단수도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술취함과 음란함이 진정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교구위원들은 휘트필드가 불러온 이른바 '파괴된 질서'에 격분했다.

아리우스주의(Arianism; 4세기 초 알렉산드라이 사제 아리우스가 처음 주장한 이단설.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소시니주의(Socinianism; 종교개혁 이래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반삼위일체적 신학에 붙여진 명칭. 유니테리어니즘이라고도 한다), 이신론(理神論;Deism,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한 뒤로는 초연한 입장으로 물러앉아 이 세상이 합리적인 자연법에 따라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주장) 등에는 그토록 관대하던 주교들이 정작 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성령의 활동을 선포한 휘트필드에게는 뛸 듯이 분개하며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영국 성공회 내에서 휘트필드의 활동 영역은 모든 면에서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처럼 중대한 시점에서 휘트필드의 사역 방향을 돌려놓은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선택한 야외 설교였다. 그 당시 곳곳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주일에도 예배당에 나가지 않고 빈둥거리거나 죄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휘트필드는 그 특유의 거룩한 진취성으로 "큰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주님의 집을 채우기로"(눅 14:23) 결심했다.

마침내 1739년 2월, 킹스우드에 있는 광산촌에서 야외 설교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많은 날들을 기도로 준비한 그는 하남산 언덕 위에 서서 광부들 백여 명에게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이 사실은 광부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청중 수가 급속히 불어나 마침내 수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휘트필드는 그때 평생 단 한 번도 교회에 나가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소외되어 살아온 광부들의 반응을 기록해 놓았는데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신들에게 내세울 만한 의가 없다는 걸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네. 정말이지 예수님이 세리(稅吏)의 친구이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탄광에서 나온 그들의 새까만 볼이 흐르는 눈물로 온통 얼룩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그들이 감동받았다고 확신했네. 놀랍게도 수백 명이나 되는 광부들이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닫고, 마침내 철저하게 회심하는 기쁨을 누렸지. 하지만 이처럼 너무나 분명한 변화를 직접보고도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네. 그런 상황 자체가 난생 처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내적 갈등을 겪었던 게지.

사실 나는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서면 하나님께나 그들에게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렸다네. 이 모든 일을 내 힘으로 했다고 우긴다면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이 되겠지. 창공을 머리에 두고 양옆 들판의 경치를 배경으로 마차 안이나 말 위에서, 또는 나무에 올라가 때때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수천명의 사람들을 보면서 내 영혼에 얼마나 벅찬 감동이 밀려왔는지 자네는 정말 모를 걸세."

두 달 뒤인 1739년 4월 27일, 휘트필드는 런던에서 다시 야외 설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배경이 좀 기이하다. 그는 친구인 스톤하우스 목사를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즐링턴에 갔다. 기도시간에 교구위원들이 휘트필드에게 런던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그 당시 런던 교구에서 집례하던 성직자들이 보통 그렇듯이 휘트필드에게는 이런 허가증이 없었다. 교구위원들로부터 강단 설교를 금지당한 휘트필드는 성찬식이 끝난 뒤 밖으로 나가 교회 뜰에서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사 청중들을 놀랍도록 감동시키셨다. 설사 그들이 옥에 갇힌다 해도 그 감동과 기쁨으로 찬양을 쉬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반대자들은 내가 자신들의 회당에서 뛰쳐나왔다고 떠들어 대지만 그리 말하면 곤란하다. 사실은 그들이 나를 쫓아낸 셈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날씨와 계절이 허락하는 한 끊임없이 야외에서 설교를 했다. 이틀 뒤인 4월 29일 일요일, 휘트필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어필즈에서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나서 기력을 회복한 후 런던에서 3.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케닝턴 공원에서 설교를 했다. 그곳에는 3만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부터 휘트필드는 해크니 들판, 매리번 들판, 메이페어, 스미스필드, 블랙히스, 무어필즈, 케닝턴 공원 등 빈둥거리며 안식일을 어기는 불신자들이 모여드는 런던 주위의 넓은 공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증거했다.(주석3 : 독자들은 이 모든 일이 런던이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작았던 백 년 전에 일어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휘트필드가 설교하던 당시에 공터였던 곳에 지금은 대부분 건물이 들어서 있다. 지금까지 공터로 남아 있는 곳은 케닝턴 크리켓장과 블랙히스뿐이다.) 그리고 예배당에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선포된 복음을 귀기울여 듣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순수한 신앙 운동은 계속되었고, 불에서 건져낸 나무토막처럼 수많은 영혼이 사탄의 손에서 해방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 당시 교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몇몇 성직자들을 제외하고는 성직자들 대부분이 이 이상한 설교자를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자기에게 소용없는 것도 막상 남이 쓰려면 방해하는 심술쟁이처럼, 그들은 이교도나 다름없는 군중들에게 찾아가지도 않았고 다른 누가 그 일을 대신 하는 것도 탐탁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이때부터 영국 성공회 내에서 휘트필드의 모든 공적 활동은 전면 중단되다시피 했다. 휘트필드는 자신이 사제 안수를 받은 성공회를 사랑했다. 그리고 신조를 귀하게 여겼고 성공회의 기도서를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성공회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의 사역이 가져다주는 그 어떤 유익도 얻지 못했다. 당시의 영국 성공회는 휘트필드 같은 인물을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성공회로서는 휘트필드를 이해할 수 없었고, 복음에서 소외된 영혼들을 마냥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휘트필드를 향해 분통을 떠뜨렸다.

이때부터 죽는 날까지 휘트필드는 쉴 틈 없이 많은 일들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오직 한 가지 일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도 그는 한결같았다. 매년 변함이 없었다. 만약 그의 행적을 추적한다면 똑같은 행로를 계속 반복하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1739년부터 그가 사망한 1770년까지, 31년 동안 그의 인생에는 단 한 가지 사역밖에 없었다. 그는 참으로 한 가지 일, 바로 주님의 사업에만 몰두했다. 주일 오전부터 토요일 밤까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앓아 누울 때를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는 복음전도자가 되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 있는 거의 모든 주요 도시를 방문했다. 교회를 개방한 곳에서는 교회에서, 부속 예배당만 개방한 곳에서는 또 흔쾌히 그곳에서 설교를 했다. 교회도, 부속 예배당도 모두 닫았거나 청중들을 수용하기에 너무 좁을 때면 기꺼이 설교 장소를 야외로 옮겼다. 그는 31년 세월동안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하나뿐인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했고, 또 언제나 엄청난 성과를 낳았다. 어느 성령강림절 주간에는 무어필즈에서 설교를 한 뒤에 영적인 고민에 빠진 사람들로부터 편지를 천 통이나 받았고 350명에게 성찬을 베풀었다. 이렇게 31년간 사역하는 동안 그는 공적으로 만 8천 번이나 설교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당시 도로 사정이나 수송 수단을 고려할 때 그는 경이로울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녔던 것 같다.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고후 11:26)을 잘 알게 되었다. 그는 느려터진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일곱 차례 왕복하며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에서 청중들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특히 성경을 사랑하는 전통이 있는 스코틀랜드를 열네 번 방문했는데, 이곳만큼 휘트필드를 환대하고 그의 사역으로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곳도 없었다. 반면에 한번은 아일랜드로 여행하는 도중에 더블린에서 무식한 천주교도 군중들에게 거의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이처럼 휘트필드는 남북으로 와이트 섬에서부터 버릭셔 주까지, 동서로는 랜즈 엔드에서 노스 포어랜드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모든 주를 두루 왕래했던 것이다.

야외 설교를 할 수 없는 겨울철, 런던에서 그가 꾸준히 계속했던 목회 활동은 놀랍기 그지없다. 영국 성공회 강단에 설 수 없게 된 그를 위해 후원자들이 토터넘 코트 로드에 지어 준 장막에서 휘트필드는 매 주일, 오전 여섯 시 반이면 성찬식을 집례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설교를 했다.

그리고 저녁 다섯 시 반에 또 설교를 한 뒤 마지막으로 장막 안에 모인 과부들과 기혼자들, 미혼자들에게 다시 설교를 한 뒤 저마다 적합한 권고를 덧붙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했다.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새벽 6시에 모임을 가졌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리고 토요일 저녁마다 말씀을 전했다. 그러니까 한 주에 무려 열세 번이나 설교를 한 셈이다! 게다가 그는 세계 각처의 사람들과 엄청나게 많은 서신을 끊임없이 교환했다.

휘트필드가 강행했던 그러한 중노동을 사람의 몸이 그토록 오래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그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서 맞아 죽지 않은 것도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사역을 완수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 불사신이었다. 그러다 1770년 9월 29일 주일, 미국 뉴베리 포트에서 그는 갑자기 죽었다. 쉰여섯밖에 안 된, 아직도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 나이였다.

휘트필드는 애버게버니 가문의 제임스라는 과부와 결혼했는데 뒤에 사별을 했다. 부인에 대한 몇 안 되는 기록으로 추정해 볼 때, 그리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니었던 듯 싶다. 슬하에 자녀도 없었지만, 그가 후세에 남긴 명성은 자식을 통해 후손에게 전해지는 평범한 이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주지 휘트필드만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위대한 복음전도자의 죽음과 관련된 정황과 구체적인 내용은 아주 흥미롭게 때문에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의 죽음은 그의 인생 행로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30년 넘게 해 오던 대로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설교를 하고 죽었다. 말 그대로 일하다가 죽은 셈이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돌연사는 뜻밖의 영광이다. 과연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이 땅에서 사라지고 싶다. 간병을 받으며 친구들이 나를 두고 눈물짓는 모습을 보면서 사는 것은 정말이지 죽느니만 못한 일이다."

휘트필드의 이러한 마음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천식을 앓고 있던 그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어 죽음을 맞았다. 친구들이 미처 그의 병에 대해 알기도 전이었다.

그가 죽는 전날인 9월 28일 토요일 오전, 그는 주일에 뉴베리 포트에서 설교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뉴햄프셔의 포츠머스에서 말을 타고 출발했다. 도중에 그는 엑세터라는 곳에서 갑작스럽고도 간곡한 설교 요청을 받았는데, 몸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았지만 차마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설교에 앞서 한 친구가 평소보다 불편해 보인다며 설교보다는 수면을 취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자 그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고는 옆으로 비켜서서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주 예수여, 당신의 일을 하느라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일에 싫증난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이 아직 남았다면 다시 한 번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증거하게 하소서. 제게 주신 말을 다한 후에 주님께 가게 하소서."

그리고는 그길로 곧장 가서 들판에 있는 무수한 군중에게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을 가지고 거의 두 시간 가량 설교를 했다. 이것이 그가 한 마지막 설교였으니, 그의 평생 경력에 참으로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휘트필드의 마지막 설교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런 그의 모습만으로도 능력 있는 설교가 되었다. 마른 얼굴과 창백한 안색, 노쇠한 몸으로 천상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애쓰는 모습, 이 모두가 참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그의 육신은 죽어 가고 있었다.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런 상태로 몇 분인가 있더니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도우시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그의 최고의 설교라고 부를 만한 마지막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 후반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저는 이제 그만 갑니다. 제게 예비되어 있는 안식을 찾아 떠납니다. 저의 태양이 떠올라 많은 사람에게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 때가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영원히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빛으로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이 땅에선 저보다 오래 살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에서 그들은 저보다 더 오래 머물 순 없을 것입니다. 제가 죽고 제 육신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겠지만, 저는 시간도, 나이도, 질병도, 슬픔도 없는 세상에 있을 것입니다. 제 몸은 쇠하여가지만 제 영은 영원으로 갑니다. 그동안 그리스도를 전하며 사는 영원한 삶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죽으려 합니다. 제 앞에 놓인 엄청난 과업에 비하면 저의 인생은 참으로 짧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너무도 적은 지금이지만, 제가 떠난다 해도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설교가 끝난 뒤 휘트필드는 친구와 식사를 하고는 극도로 지친 몸을 이끌고 뉴베리 포트로 향했다. 도착한 후 일찍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을 보기 위해 모인 친구들에게로 다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말하면서 그의 심령에는 다시 열정이 피어올랐고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양초가 다 타 버렸다.

이윽고 그는 잠자리에 들었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안 돼 천식으로 인해 갑작스런 발작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6시를 넘기지 못하고 위대한 설교자 휘트필드는 이 땅을 떠났다. 우리 중에 죽음을 미리 준비한 사람이 있다면, 휘트필드야말로 그런 사람이리라! 죽임이 임박했을 때 그에게는 그야말로 죽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그가 죽은 마을, 애초에 설교하기로 약속했던 교회의 강단 아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때부터 이 조그만 마을은 조지 휘트필드의 유골이 안치된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금까지 나는 100년 전 '영국 복음전도자들의 황제' 휘트필드의 생애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을 소개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쳤는지, 설교 방식은 어떠했는지와 같은 주제들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2

나는 조지 휘트필드가 18세기 영국 종교개혁가 가운데 단연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가 이 땅에 끼친 유익이나 그가 했던 설교의 특징, 사람됨 등은 살펴볼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것들과 관련해 많은 오해들이 있다.

어쩌면 이런 오해들은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휘트필드에 대해 바른 견해를 형성할 만한 자료들이 너무도 불충분하다. 휘트필드는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쓴 버니언처럼 대중적인 저서를 통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 아니었다. 마틴 루터처럼 한 국가를 등에 업고 제후들과 한편이 되어 배교한 교회에 대항해 개혁운동을 벌인 사람도 아니었다. 존 웨슬리처럼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 교단에서 그가 남긴 저술들을 신봉하고 그의 어록과 행적을 최상의 상태로 보존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오늘날엔 루터파도 있고 웨슬리주의자들도 많건만 휘트필드주의자들은 없다. 정말 없다!

18세기의 위대한 전도자 휘트필드는 소박하고 솔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하기 위해 살았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다. 그 외의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고 보면 천국에는 분명 그에 대한 방대하고 충실한 기록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 남아 있는 기록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 밖에도 어느 시대에나 휘트필드 같은 사람에게서 광신주의와 열광주의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라는 점 또한 그에 대한 오해를 뒷받침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가 신앙의 '열정' 같은 말에는 질색을 한다. 그래서 세상을 뒤집어엎고 대대로 내려온 전통 방식과 결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전력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싫어한다. 그러니 그들이 휘트필드의 사역이 가져다주는 것이라곤 일시적인 흥분 상태일뿐이고, 그의 설교는 진부한 내용을 큰 소리로 반복한 것에 불과하며, 그의 성품 역시 특별히 흠모할 만한 데라곤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만약 1,800년 전이었다면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휘트필드가 이 땅에 어떤 유익을 끼쳤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분명하다. 그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된 영혼들에게 그가 끼친 직접적인 유익은 대단하다. 아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나는 믿는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미국 등지에서 믿을 만한 목격자들이 남긴 기록들을 보면 휘트필드를 통해 수천 명이 회심했다고 한다. 그가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기뻐하고 흥분했으며, 나아가 단호히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순전한 종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머릿수 세기에 연연해선 안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오직 우리 주 하나님만이 마음을 감찰하시고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이 부흥하는 시기에는 전혀 회심하지 않았는데도 회심한 사람으로 오인받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내가 휘트필드가 끼친 유익을 높이 평가하는 데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음을 독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독자들은 휘트필드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이 그의 사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주목해 주기 바란다.

저명한 미국의 철학자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냉담하고 계산적인 퀘이커 교도였으며 그 어떤 성직자의 활동에 대해서도 과장하여 평가를 내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휘트필드의 설교 하나로 필라델피아 주민들의 삶이 바뀌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마치 종교에 대해 멀리하거나 무관심하던 온 세상이 종교에 빠지고 있는 듯했다."고 털어놓았다. 여기서 프랭클린 자신이 필라델피아에서 기독 서적을 출판하는 꽤나 이름난 출판업자였다는 말을 덧붙여야겠다. 그런 그가 휘트필드의 설교와 글을 기꺼이 출판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에게 끼친 휘트필드의 영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머클로런(Maclaurin)과 윌리슨(Willison),그리고 머컬럭(Macculloch)은 트위드 북부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스코틀랜드 목사들이었는데, 그 중 앞의 두 사람은 신학저술가로도 손꼽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휘트필드가 스코틀랜드에 지대한 유익을 끼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다고 거듭 증언했다. 특히 윌리슨은 "하나님께서 지위와 교파를 막론하고 죄인들에게 놀라운 사역을 행하도록 허락하셨다"고 말했다.

허더스필드와 옐링 지역에 사는 헨리 벤(Henry Venn)은 대단한 분별력과 덕망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휘트필드를 평가하기를, "휘트필드 선생은 아무런 사심 없이 그토록 많은 곳에서 엄청난 노고를 아끼지 않아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의 자녀들 가운데 휘트필드 선생에 버금갈 사람은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고 했다. 또한 덧붙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의 엄청난 노고는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다. 휘트필드의 사역을 보증하는 것은 모인 이들의 머릿수만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가 누린 놀라운 인기는 오로지 그가 끼친 유익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가 설교자로 입을 여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말에 비상한 축복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존 뉴튼(John Newton)은 저명한 복음전도자일 뿐 아니라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휘트필드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주님께서 휘트필드 목사를 통해 참으로 많은 영혼을 기꺼이 구원하셨다. 그것 때문에 그는 빛난 명성을 얻었고, 그것이 이제 그에게 자랑의 면류관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의 설교가 열매를 맺지 못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의 발이 닿았던 광범위한 사역지 대부분에서 우리는 휘트필드를 영적인 아버지로 인정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존 웨슬리는 몇 가지 사소한 신학적 논점에서 휘트필드와 의견을 달리했다. 하지만 휘트필드의 장례식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가 이제껏 그토록 무수한 죄인들을 회개시킨 사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토록 많은 죄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신성한 도구로 쓰임 받은 사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위에서 나열한 모든 증언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소중한 내용들이지만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휘트필드가 막대하게 끼친 간접적인 유익이다. 그의 사역이 끼친 직접적인 영향도 컸지만, 간접적인 영향들은 더욱 컸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의 설교를 직접 듣거나 보지는 못했어도 그가 평생 동안 했던 사역을 통해 축복을 누린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는 실로 종교개혁의 모태가 되었던 오래된 진리들을 18세기에 다시 부흥시킨 선구자였다. 종교개혁가들이 가르친 교리들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그들의 신앙고백서들과 설교들, 그리고 영국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신학자들의 신학에 대해 끊임없이 인용하는 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원칙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러한 전모가 제대로 알려지기만 했더라도 영국 성공회 안에서 복음주의가 생겨나고 성장한 데는 누구보다도 휘트필드의 영향이 지대했음이 드러났으리라고 믿는 바이다.

하지만 휘트필드가 당대에 끼친 간접적인 유익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불신자들과 회의자들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는 법을 보여 준 선구자였다. 그들에게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차갑고 형이상학적인 논증이나 건조하고 비판적인 탐구가 아니라,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며 더 나아가 온전한 복음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신앙의 홍수를 격퇴한 주역은 리런드(LeLand), 셜록(Sherlock), 워터랜드(Waterland), 레슬리(Leslie) 등의 저술이 아니라 휘트필드와 그의 동료들이 들려준 설교였던 셈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 투사였다. 불신자들은 추상적인 논증만으로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논증은 복음의 진리와 복음에 충실한 삶이다.

무엇보다 휘트필드는 차머스 박사(Thomas Chalmers; 1780-1847, 스코틀랜드 성직자이자 설교가이며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를 설립했다)가 말한 공격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한 최초의 영국 사람인 것 같다. 휘트필드는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었다. 목회자들은 불신자들이 먼저 다가오기를 마냥 기다려서는 안 되며 그들을 쫓아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주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실제로 그는 비 오는 날의 고양이처럼 화롯가에 얌전히 죽치고 앉아 이 땅이 사악하다고 한탄하지 않았다. 대신에 마귀의 소굴로 직접 찾아가서 마귀에게 대항했다. 죄와 사악함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빠져 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죄인들을 쫓아 구석구석까지 뛰어들었다. 무지와 악덕이 판을 치는 곳에서는 무지와 악덕을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 전략은 당시 영국에서는 처음 시도된 것이었으나 일단 물꼬를 트자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도시 선교, 농촌 선교, 분교구 전도회, 야외 설교, 축호 전도, 특별 예배, 극장 설교 등 이 모두가 '공격적인 전략'을 이제 모든 교회가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다. 지금 우리는 100년 전보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훨씬 더 잘 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조지 휘트필드였음을 잊지 말고 그가 끼친 공로를 인정하도록 하자.

다음으로 검토할 주제는 휘트필드 설교의 독특성이다. 비할 바 없는 그의 성공에 대한 비밀을 궁금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대단히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흔해빠진 광신적인 감리교인에 불과하며, 유창한 말솜씨나 확고한 교리 그리고 그 큰 목소리만 빼면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는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천박함이라면 조금만 따져봐도 금세 드러난다. 그런데 존슨 박사는 어리석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휘트필드는 큰 소리로 설교해서 인상을 남겼지만, 거리에 돌아다니는 약장수만큼도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나마 관심을 끈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해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존슨 박사는 다른 목회자들이나 신앙에 대해 논할 때도 이 같은 오류를 많이 범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사실과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휘트필드는 분명 영국의 다른 어떤 설교자들보다도 군중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했다. 그만큼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할 것 없이 방문하는 나라마다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설교자는 없었다. 그가 31년 동안 한결같이 그랬던 것처럼 청중들에게 끊임없이 영향력을 끼친 설교자 역시 없었다. 그의 인기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죽는 날까지 사그라질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휘트필드가 설교할 때면 사람들은 사업장과 일터를 떠나 그 주위로 모여들었고 그가 전하는 영원한 진리에 귀기울였다. 이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0년 넘게 '군중들'의 귀를 사로잡고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휘트필드의 설교는 모든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빈부 차, 학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만약 그의 설교가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만 인기 있었다면, 열변과 큰 소리 외에는 별다를 게 없는 설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많은 귀족들과 상류계층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로시언 후작, 리번 백작, 버컨 백작, 레이 경(卿), 다트머스 경, 제임스 고든 경 등이 그를 열렬히 찬양했고 여기에는 헌팅턴 부인을 비롯해서 많은 부인들도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볼링브로크 경, 체스터필드 경 같은 저명한 평론가이자 문필가들도 휘트필드의 설교를 즐겨 들었다. 차갑고 무표정하기로 유명한 체스터필드 경도 휘트필드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얼굴빛이 다 밝아지곤 했다고 한다. 볼링브로크는 또 이렇게 말한다.

"휘트필드는 이 시대의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그의 설교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언변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철학자 프랭클린 역시 휘트필드의 설교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역사가 흄도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30킬로미터를 달려가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다고 말할 정도다.

이와 같은 무시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들은 휘트필드의 설교가 고함 소리와 열광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엎는다. 볼링브로크, 체스터필드, 흄, 그리고 프랭클린은 쉽사리 속아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로 유능한 비평가들이었으며 설교를 듣고 나름대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사심이나 편견이 없는 그들의 의견은 휘트필드의 설교에는 뭔가 아주 비범한 것이 있음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하지만 그런 증언들이 '휘트필드가 유례없는 인기를 누리고 성공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휘트필드 설교의 특성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순전한 복음만을 전했다. 이제까지 그처럼 청중들에게 알곡만을 전달한 설교자는 거의 없었다. 일단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서면 파티나 자기 주장, 개인적인 관심사나 사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죄, 심령, 예수 그리스도, 성령, 절대적으로 필요한 회개와 믿음과 성결(聖潔)등등 핵심적인 주제들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전했을 뿐이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오,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여!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날마다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설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설교이며, 진리를 탁월하게 드러내는 설교임에 틀림없다.

둘째, 대단히 명료하고 단순했다. 교리에 대한 입장이 어떠하든 청중들은 그가 하는 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쉽고 분명하게,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말했다. 짧은 단문을 선호했고, 언제나 표적을 겨냥하여 '곧장' 덤벼들었다. 자연 청중들은 난해한 논증이나 복잡한 추론으로 골치 아플 일이 없었다. 단순한 성경 말씀, 절묘한 실례(實例), 적절한 예화 등이 휘트필드가 설교할 때 즐겨 사용한 무기들이었다. 그 결과 청중들은 언제나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청중들이 이해 못 할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이런 것은 설교자로서 성공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는 이해하기 쉬운 설교를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따라서 '쉬운 것을 어렵게 설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어려운 것을 쉽게 표현하는 것은 위대한 설교자의 일이다"라는 어셔(James Ussher; 1581-1656, 아일랜드 신학자) 대주교의 말은 지혜롭기 그지없다.

셋째, 대단히 담대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는 '우리' 같은 불명확한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영국 강단의 관행이 되어 버린 그런 표현은 청중들의 마음에 혼란만 남길 뿐이다. 그래서 휘트필드는 하나님께로부터 각 사람의 영혼에 대해 개별적으로 주신 메시지를 받아 전하는 것처럼 사람들 모두를 직시했다. 그 결과 휘트필드의 청중들은 대개가 그의 설교가 특별히 자신을 위한 설교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설교자들처럼 긴 본론 끝에 짤막한 적용을 덧붙이는 데에 만족하지 않았고 설교 전반에 걸쳐 적용을 했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당신에게 해당됩니다."

휘트필드는 청중들이 그냥 손 놓고 듣도록 내버려 두는 법이 없었다.

넷째, 탁월한 묘사력이 돋보였다. 아라비아에는 '청중의 귀를 눈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연사'라는 속담이 있다. 휘트필드에게는 바로 이런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너무나 잘 극화시켰기 때문에 청중들은 마치 그 주제가 자신들의 눈 앞에서 움직이고 걸어다니는 것처럼 느꼈다. 또한 설교의 주제를 더없이 생생하게 그려 내어 청중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직접 보고 듣고 있다고 믿을 지경이었다.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체스터필드 경이 청중들에 섞여 설교를 듣고 있었다. 위대한 설교자 휘트필드는 회심하지 않은 죄인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한 눈먼 거지를 예로 들었다. 어두운 밤, 길은 험한데 가엾은 거지가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안내견을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 이제 길을 더듬어 갈 도구라고는 지팡이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에 열중한 휘트필드가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린 나머지 청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들었는데, 마치 불쌍한 거지 노인이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보는 듯했다. 마침내 그 거지가 마지막 걸음을 내디디며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 장면을 묘사할 때, 체스터필드 경은 정말로 그 거지를 구하려고 앞으로 뛰어나가며 크게 소리쳤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휘트필드의 설교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그 모두가 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다섯째,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실제로 휘트필드를 두고 "사자처럼 설교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사람들에게 휘트필드는 자신이 전하는 말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또한 청중들이 설교 내용을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했다. 분명 그의 설교는 아침저녁에 정기적으로 발사되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포츠머스 항구(영국 남부의 군항)의 예포와는 달랐다. 정말이지 설교가 생명력으로 불타올랐다.

아무도 그 설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설교 시간에 존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좋건 싫건 그의 설교는 청중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에게는 시선을 확 잡아끄는 거룩한 격렬함이 있었다. 청중들이 채 어떤 행동을 취할지 따질 여유도 갖기 전에 그 생명력으로 청중들을 완전히 압도해 버렸다. 이것 또한 그의 설교가 청중들을 감동시킨 하나의 비결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이 설교자를 믿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먼저 설교자 자신이 정말 진지하다는 사실을 듣는 사람들이 믿게 해야 한다. 유능한 설교자와 그렇지 못한 설교자의 차이는 보통 설교 내용보다는 그 내용이 청중에게 어떻게 다가오도록 하는가에 있다.

휘트필드의 전기 작가 중 또 한 명의 기록을 인용해 보자.

"어떤 미국 신사가 휘트필드의 설교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날 따라 날은 잔뜩 흐렸고 청중도 적은편이었으며, 왠지 설교의 서두마저 맥이 없어 보였다. 미국 신사는 '뭐 별거 아니잖아'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청중들도 자기만큼이나 관심이 없는 듯했다. 심지어 한 노인은 강단 앞에서 졸기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휘트필드가 설교를 중단했다. 안색이 변했고 바뀐 어조로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제 이름으로 여러분께 말하러 왔다면, 여러분은 무릎에 턱을 괸 채 졸다가 가끔 올려다보며 이 떠버리가 뭐라고 하는 거야라고 말해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이름으로 여러분께 온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왔습니다'(이 부분에서 그는 건물이 울릴 만큼 세게 강단을 내리쳤다). 따라서 여러분은 반드시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청중들은 깜짝 놀랐고 졸던 노인은 즉시 깨어났다. 이번에는 휘트필드가 노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어르신을 깨워 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깨워 드리려고 강단을 세게 내리친 겁니다. 저는 나무나 돌에 대고 설교하러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여러분은 제 말을 들어야만 합니다.'청중들의 무관심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고 그 뒤로 청중들은 단어 하나까지 세심하게 들었으며 미국 신사는 그 설교를 결코 잊지 못했다."

여섯째, 휘트필드 설교의 특징 가운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만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설교에 항상 담겨 있던 엄청난 열정과 감정이다. 강단에서 펑펑 우는 것은 그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휘트필드 노년의 선교 여행에 자주 동행했던 코닐리어스 윈터(Comelius Winter)가 눈물 없이 설교 한 편을 다 끝내는 휘트필드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그의 모습은 절대 가식이 아니었다. 휘트필드는 자기 앞에 영혼들에 대해 진심으로 마음이 찢어지는 연민을 느꼈고, 그러한 감정이 눈물로 표현된 것이었다. 아마도 휘트필드 설교를 성공시킨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영혼에 대한 각별한 마음에서 우러난 눈물은 사람들에게 이제껏 그 어떠한 논증이나 증거로도 할 수 없었던 특별한 애정을 불러 일으켰고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그 눈물을 접하고 나서 그에 대해 편견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누그러졌다. 자신들의 영혼을 두고 그토록 우는 사람을 차마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휘트필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설교를 들으러 왔습니다. 주머니에 돌을 가득 담고서 말입니다. 당신의 머리를 박살낼 생각이었죠. 하지만 오늘 당신의 설교가 나를 이겼습니다. 내 마음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단 어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그가 하는 어떤 말이든 기꺼이 귀기울이게 되는 법이다.

이제까지 해 온 휘트필드 설교에 대한 분석에다가 마지막으로 그가 훌륭한 설교자가 되기에 적합한 보기 드문 재능들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그의 몸짓은 완벽했다. 유명한 배우였던 개릭(David Garrick)도 설교 내용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의 몸짓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또한 그의 목소리 역시 몸짓만큼이나 훌륭했다. 휘트필드의 목소리는 3만 명이 동시에 들을 수 있을 만큼 우렁찼고, 그러면서도 운율과 음색이 절묘해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청중을 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강단에서 몸가짐은 너무나 우아하고 매력적이어서 누구나 그의 설교를 5분만 들으면 그가 사팔뜨기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고들 말했다. 그리고 탁월한 언변과 어휘구사력을 갖췄던 그는 단어 하나도 때와 장소, 설교 내용에 따라 언제나 적절하게 사용했다. 이제 이러한 재능들을 앞서 언급한 내용들에다 더한 다음, 이것들이 설교자로서의 그의 능력과 인기를 설명하기에 충분한지 따져 보자.

나로서는 휘트필드처럼 탁월한 자질들을 골고루 갖춘 영국의 설교자는 없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바이다. 물론 그가 가진 재능들 가운데 어떤 한 가지 면에서는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어쩌면 또 다른 사람들이 그의 또 다른 재능에서 그에게 필적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할 데 없는 목소리와 몸가짐, 말투, 몸짓, 어휘구사력 등 설교자가 구비해야 할 최상의 재능들을 고루 갖추었다는 면에서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휘트필드만큼 출중한 인물은 없었다. 생사를 막론하고 영국의 어떤 설교자도 그를 따를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클래런던(Clarendon)은 진정한 유창함을 "다른 사람들이 믿게끔 만드는 신비로운 능력"이라고 정의했는데, 진귀한 재능들을 절묘하게 갖추었던 휘트필드야말로 진정한 유창함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18세기의 이 위대한 영적 영웅의 내면생활과 개인적 특성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 들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그는 너무나 투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사과나 해명이 필요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의 결점과 장점은 모두 다 대낮만큼이나 분명하고 명백했다. 따라서 그의 편지나 동시대 사람들의 기록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성격들을 몇 가지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줄 알고, 그것으로 휘트필드에 대한 이 간략한 기록의 결론을 대신하려 한다.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가식 없는 사람이었다. 길리스 박사(Dr Gillies)가 출판한 1,400통에 달하는 그의 편지를 읽어 보면 누구라도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더할 수 없이 낮추어 부르고 있다. 1753년 9월 11일에 쓴 편지를 보자.

"하나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한없는 자비하심으로 제게 겸손하고 감사하며 순종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진실로 저는 가장 악한 자보다 더욱 악합니다. 저 같은 죄인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놀라울 뿐입니다."

1753년 12월 27일에는 이렇게 썼다.

"나같이 나태하고 냉담하고 무익한 벌레 같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도록 하게나.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차라리 깨어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제발 나에게 박차를 가해 주게나. 그리고 자네의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시작하게."

어쩌면 이러한 표현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가식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표현에 모든 신앙의 위인들이 했던 경험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스터(Baxter),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맥케인(M`Cheyne) 같은 사람들도 그렇게 자신들을 낮추어 부르지 않았는가! 실로 그러한 겸손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과 동일한 마음가짐이었다. 언제나 가장 많은 빛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가장 겸손한 법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은 그가 쓴 모든 편지마다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향유(香油)와도 같이 그것은 휘트필드의 모든 말과 글에 특이한 향을 주었다. 정말이지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일에 결코 싫증 내지 않는 사람 같았다. 진정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말처럼 "나의 주님"이 휘트필드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랑, 대속, 보혈, 의, 죄인들을 기꺼이 용납하심, 성도들에 대한 인내와 친절한 보살피심과 같은 테마들이 그에게 항상 새롭게 다가왔다. 이런 점에서 휘트필드는 스코틀랜드가 낳은 탁월한 신학자 새뮤얼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를 참 많이 닮았다.

그는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지치지 않고 부지런히 힘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교회사에서 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분을 섬기는 데 자신을 온전히 다 바친 사람을 찾기란 아마 어려울 듯 싶다. 헨리 벤(Henry Venn)은 베스(Bath)에서 했던 휘트필드의 추도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엄청난 사역은 참으로 큰 표적과 기사였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30년 가까이 중단 없이 그러한 사역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오랫동안 폐를 빈번하게 혹사시키는 일만큼 사람의 몸을 지치게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인체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스무 살이 갓 넘어서부터 한 주에 보통 40시간, 아니 걸핏하면 60시간을 그것도 수십 년에 걸쳐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이나 하겠으며, 게다가 그런 무리한 일정의 설교가 끝나면 휴식을 취하기보다 초대받은 모든 집에서 찬양과 신령한 노래들과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이 비범한 하나님의 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 년에 걸쳐서야 할 수 있는 일을 단 2,3주 만에 해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활방식은 참으로 단순했다. 항상 필요한 만큼만 먹고 마셨다. 그리고 늘 아침 일찍 일어났다. 기상 시간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똑같이 새벽 네 시였고 저녁 열 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그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느라 밤을 지내는 일도 잦았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잔 적이 많았던 코닐리우스 윈터는 휘트필드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위해 때때로 밤중에 일어나곤 했다고 전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일을 돕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돈에 관심이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필요한 데 쓰라고 건네는 돈은 거절했다. 한번은 천5백만 원을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는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으며 부유한 가정을 꾸리지도 않았다. 사후에 남긴 얼마 안 되는 돈은 모두 친구들의 유산이었다. 교황이 루터를 향해 "이 짐승같은 독일놈은 황금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상스럽게 내뱉던 말을 휘트필드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놀랄 만큼 청렴한데다 한 가지에만 시선을 집중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 부차적이고 숨겨진 인생의 다른 목적 같은 것은 전혀 몰랐다. 추종자들을 모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교단을 설립하지도 않았다. 그가 즐겨 쓰던 다음과 같은 표현이 휘트필드의 사람됨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조지 휘트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게 하라."

그는 대단히 즐겁고 유쾌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의 신앙을 누리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었다. 비방, 질시, 거짓형제들의 모함, 무지한 성직자들과 도처에서 부딪히는 반대, 끊임없는 논쟁에 따른 걱정 등 오랜 사역으로 여러 면에서 지치기는 했지만 휘트필드는 결코 쾌활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환희에 찬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런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고 싶어했다. 그가 죽은 뒤, 뉴욕의 한 덕망 있는 부인은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휘트필드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놀라운 증언을 했다.

"휘트필드 목사님은 너무나 쾌활하셨지요. 그 모습 때문에 저도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걸요."

끝으로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는 참으로 관대하고 포용할 줄 알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편협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영 바깥에는 열매가 있을 수 없고 자신들만이 진리와 천국을 독점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휘트필드는 달랐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 모든 사람들을 천사들의 잣대로 측정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도가 누리는 거룩한 교제에 참여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그의 형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세상에서 무슨 이름으로 불리건 그의 영혼은 그들 편이었다. 휘트필드는 사소한 차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주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내게는 몇 가지 실제적인 교훈을 밝히는 일만 남았다. 그러한 교훈들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그 교훈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첫째, 이 시대를 살릴 방법은 무엇인가? 로마 가톨릭의 해악, 불신앙의 해악, 옥스퍼드운동(19세기, 영국 성공회의 프로테스탄트적 경향을 반대하고 '가톨릭', 즉 로마 가톨릭교의 사상과 전례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의 해악, 합리주의 신학의 해악, 노동자계층에 존재하는 악덕, 식자층에 팽배한 악덕등 정말이지 우리 주위에는 사방으로 악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진정한 치료제는 무엇인가? 이 적들과 맞서기 위해 휘두를 무기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소망이 있는가?

나는 이 시대의 악을 치료하는 진정한 치료제는 100년 전에 그 효력이 입증된 두 가지뿐이라고 확신한다. 18세기 영국의 종교개혁가들이 전했던 순전하고 순수한 교리, 그리고 그들과 같은 설교자들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제도, 새로운 학교, 새로운 신학, 새로운 의식이나 새로운 복음 같은 새로운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래된 진리들을 올바로 선포하고 양심과 지성과 의지에 제대로 전하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복음주의 신학이 100년전에 영국을 영적으로 부흥시켰던 것처럼, 나는 그것이 지금의 영국을 다시 부흥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음의 진리를 충실히 선포하는 일 말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기독교가 세상에 유익을 끼친 적이 없다. 사도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승리와 모든 영적 부흥은 100년 전에 영국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었던 바로 그 복음을 가르친 덕분이었다. 합리주의 신학과 옥스퍼스운동이 타종교나 불신앙, 부도덕에 대항하여 승리한 곳이 있는가? 그것들이 민족들을 복음화하고 교구들을 전도하며 마을을 암흑에서 빛으로 바꾼 곳이 있는가? 나는 진정 그런 곳이 어디냐고 지금 큰 소리로 물어볼 참이다. 아마도 답이 없을 테니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세상에 끼친 유익은 언제나 복음주의 교리들을 채택한 결과였다. 혹여 '복음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혼 구원에 성공했다면 그들이 성공한 이유는 복음주의의 무기들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우리 암송아지로 밭을 갈지 않았다면(삿 14:18) 내놓을 수확물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힘주어 반복한다. 이 시대에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18세기 우리 선조들의 유서 깊고 단순하며 분명한 교리들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 다음으로 그 교리들을 전할, 우리 믿음의 선조들처럼 열정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잉글랜드와 웨일즈 어디든 그림쇼(Grimshaw)나 로랜즈(Rowlands), 휘트필드 같은 사람만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인물들과 설교들 앞에서 의식주의(儀式主義)와 합리주의 신학, 불신앙 등은 모두 무력해지고 쇠퇴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둘째, 18세기의 복음주의 선조들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목회자들의 사역 성과가 선조들에 비해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민감하지만 대답을 회피할 수 없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 중에는 100년 전의 교리들이 이제 세월에 닳아 효력을 상실하지 않았을까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믿는다. 내가 제시하는 답변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우리 가운데는 지난날과 같은 인물들도, 교리들도 없다. 솔직히 우리에게는 휘트필드나 로랜즈같이 특별한 능력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없다. 자기부인, 온전한 헌신, 근면성, 거룩한 대담성, 순결함 등의 측면에서 그림쇼, 워커(Walker), 벤(Henry Venn), 플레처(John William Fletcher)에 버금갈 사람이 없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18세기의 인물들도, 그런 메시지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세기의 결과들을 얻지 못한다 해서 전혀 이상할 이유가 없다. 만약 그러한 사람들과 메시지를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다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동일한 결과를 허락하시리라 확신한다.

그렇다면 현재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18세기의 위대한 선배들보다 어떤 점이 부족한가? 이 질문을 한번 직시해 보자. 조목조목 따져 보자는 말이다. 우선 그들은 교리를 대하는 자세에서 부족하다. 그들은 교리를 전할 때 철저하지도, 명확하지도, 대담하지도, 단호하지도 못하다. 강경한 발언을 할 줄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붙들어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갓난아이인 양, 자신들의 가르침에 대해 얼버무리거나 방어적으로 변명하거나 제한하려고만 든다. 게다가 설교자로서도 부족하다. 그들에게는 18세기 위인들의 특징이었던 열정도, 활발한 상상력도, 깊이 있는 생각도, 생생한 예증도, 회피할 수 없는 솔직성도, 거룩한 대담성도, 간결한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헌신된 삶의 모습이 부족하다. 그들은 그림쇼나 플레처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틀림없는 하나님의 사람들,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의 사역자이기를 자처하고 사람의 판단에 무관심하며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 세상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일을 하는, 정말이지 단 그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서 세상 사람들은 선지자의 모습을 보지 못하며,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출 34:29-35)와는 달리 실제로 그들에게는 주님의 임재가 없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내 심정은 침통하기 이를 데 없다. 나 역시 책임을 통감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밖에.

복음주의가 맥을 못 추고 있다는 진실을 회피하려 애써 봐야 아무 소용 없다. 대체로 봐서 지금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사역은 18세기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듯이 복음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복음주의자들이 교리와 생활 모두에서 전반적으로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중에는 박해가 없는 데서 오는 편안함과 인기에 대한 영합 등으로 무너진 사람들도 있고, 정치적인 쟁점들이 신앙의 생명력을 갉아먹은 사람들도 있다. 혹은 교구제도의 사소한 세부사항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바람에 정작 사역은 시들어 버린 사람들도 있으며, '지적이고 창의적'이라는 명성을 좇는 데서 오는 어리석은 긴장 때문에 망가진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관대하고 너그럽게 보이고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 사역이 마비된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신앙을 좀먹는 갖가지 역병이 만연해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 목회자들에게는 신앙의 부흥이 필요하다. 영국의 복음주의 사역이 18세기 선조들의 복음이 중심이 된 전도와 삶을 회복하면, 우리도 그때처럼 성공적으로 사역하리라 확신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 지경에 처한 것은 우리가 선조들보다 여러모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진정 부흥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우리의 운을 영국의 '복음주의' 신앙에 걸기로 결심하자. 일부에서 쏟아 내는 조롱과 멸시에 흔들리지 말자. 끝까지 고수하고 굳게 붙들고, 결코 놓지 말자. "진심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다. 진심어린 사람들은 실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럴듯한 상대주의를 조심하자. "영리한 사람이라면 교리에 대한 실수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지성숭배주의를 주의하자. 지금 말한 두 가지 위험 모두를 경계하고, 복음주의 신앙을 하나님의 진리로 굳게 붙들며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리고 진리 편을 들자. 그러면 병들었을 때나 임종의 자리에서, 죽음의 요단 강 물이 넘칠 때나 심판 날에, 복음주의 신앙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다음으로, 각자 자기 자리에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일하기로 결심하자. 누구에게나 자기 앞에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저앉지 말자. 사업장에서, 은행에서, 부대에서, 배에서, 가정에서 홀로 서 있다고 무슨 문제가 있는가! 도대체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100년 전 영국을 뒤흔들었던 소수의 무리를 생각하고 계속해서 일하자. 결국에는 머릿수가 많은 쪽이 아니라 진리를 보유한 쪽이 승리한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미디안의 백만대군보다 나았다. 복음을 마음에 품은 소수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황이나 마귀,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종들보다 더욱 강하다.

끝으로, 일하면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주의 일을 부흥시키시고, 주의 뜻을 행할 도구들을 더 많이 세우시도록 밤낮으로 기도하자. 하나님의 팔이 짧아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이전에 하신 일을 다시 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며, 100년 전에 영국을 위해 그토록 크게 신앙을 부흥시키신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기도하자. 오른손에 별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우리 목회자들의 심령에 주의 역사를 회복시키시고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을 세워 주시도록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하실 뜻도 갖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이 간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밤낮으로 부르짖어 기도하자.

"주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9:38).

 

□ 은혜의 노정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개역개정판)

하나님께서 국가나 민족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은 신실하고 순전하며 올곧은 사역자들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세속적이며 미지근하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한 민족을 맡기시는 일보다 더한 하나님의 저주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여 입에 발린 예언만을 일삼는, 양의 탈을 쓴 늑대들, 회칠한 무덤들(마 23:27)은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고 거짓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그런 일이 극에 달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기회 있을 때마다 거짓선지자들의 죄를 꾸짖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아마 예레미야만큼 거짓선지자들을 노골적으로 정죄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장 말씀은 예레미야의 그러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몇 가지 죄목으로 고발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탐욕을 꾸짖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람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 다음에 예레미야는 그들의 거짓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불쌍한 영혼들을 속인 일을 꼽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고 그들의 집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했습니다. 주님께서 틀림없이 이스라엘 땅에 전쟁을 내리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겁에 질려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유레와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거짓선지자와 거짓 제사장들은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죄책감을 달래기 바빴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백성들의 상처에 회칠을 하며 “예레미야는 광신적인 설교자에 불과하고 전쟁 따위는 일어 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습니다. 예레미야는 다가올 전쟁을 경고 했지만 그들은 평화를 연발하며 침착하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한 내용은 한 국가의 상황에 적용된 것들이지만 저는 영혼의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려는 사람들의 죄책감을 달래며 그들이 이미 충분히 선하다고 말하는 거짓교사들에게도 적용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거짓교사들의 위로를 더 좋아합니다. 우리 마음이 참으로 거짓과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아십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평안이 없는 때에 우리 영혼에 평안하다, 평안하다 외쳐 댑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찌끼같이 가라앉아서(습 1:12)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며 우쭐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말하는 평안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 아니라 사탄이 준 거짓평안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우리가 지금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해도 되는 상태인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평안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평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평안하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참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거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자신에게 무슨 변화가 필요한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내용입니다. 제게 맡겨진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저는 진정한 평안을 얻기 위해 여러분이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며,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한두 가지 주의를 드리겠습니다. 첫째, 여러분은 다음 두 가지를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내적인 문제로서 마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영혼에 일어나는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손에 성경을 들고 있다 해도,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신앙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하실 때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겉모습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내면이 그리스도인이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눅 17:21; 롬 2:28). 여러분 중에 신앙을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전하는 말씀이 그분들을 흡족하게 해 드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불쌍한 죄인의 심령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는 저를 이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마치 방언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주의를 더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냐면 저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식을 한 가지로만 제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참평안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죄책감의 정도가 다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장소에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행하십니다. 하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과 그에 따른 아픔이 다를 수 있지만, 여러분이 참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사항들을 반드시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참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음을 직시하고 절감하고 애통해해야 합니다. 행위의 언약에 따르면 “율법을 범하는 자는 죽으리라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율법이 아니라 온갖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항상 그래야 합니다. 따라서 행위의 언약에 따르자면, 생각이나 말과 행동 그 어느 것도 도덕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때에는 하나님의 손에 영원한 죽음을 당해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 번의 악한 생각, 단 한 번의 악한 말, 단 한 번의 악한 행동으로도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면, 우리 모두는 수천 번 지옥에 떨어져도 시원찮을 존재들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끊임없는 반역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먼저 깨닫고 믿지 않는 한 결코 우리 참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바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께서 이 자리에 여러분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 오셨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한 가지만 여쭤 보겠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함께 하나님의 화살이 여러분의 심령에 꽂힌 적이 있습니까? 정확한 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한 번이라도 죄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한 적이 있습니까? 죄의 무게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저지른 범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쳐 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을 누르는 죄의 짐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던 적이 있습니까? 이와 같은 일들이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 사이가 오간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적이 없다면 결단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자기 심령에 평안하다고 아무리 말할지라도 거기에는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다면 여러분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님께서 여러분을 일깨우사 회심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행한 죄를 깨닫고 두려움에 떤다 해도, 여러분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를 수도 있고 심령에 역사하는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평안을 얻으려면 죄악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모든 범죄의 근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원죄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갖고 때어나는 최초의 타락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자신이 논리적이라 생각하고 원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담의 죄를 우리에게 덮어씌운다며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합니다. 우리에게 야수와 마귀의 표식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들은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세상이 얼마나 혼란한지 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 밖이 과연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신 낙원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어긋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죄를 증명할 다른 증거를 다 제쳐 두고라도 늑대와 호랑이가 인간에게 덤비는 것, 개가 우리를 보고 짖는 것이 원죄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담의 첫 번째 범죄가 아니었다면 사자와 호랑이가 감히 우리에게 덤비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짐승들이 우리에게 대항하는 것은 마치 “너희들은 하나님께 범죄했다. 우리는 우리 주인의 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되는 인간의 성질과 탐욕이 가득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교만과 악의, 복수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질들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첫 조상 아담에게서 나왔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후, 바로 마귀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되면 이제껏 주장해 왔던 세상의 논리는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진정한 오염원을 느끼고 보기 시작합니다. 죄인에게 영적인 각성이 임할 때 제일 처음 생기는 의문은 ‘내가 어쩌다 이렇게 악하게 되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그에게는 본성적으로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면 이 불쌍한 죄인은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길로 접어든 혐오스러운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자신에게 영법을 내리시고 자신을 끊어 버리심이 합당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설령 그가 평생에 죄를 단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느끼고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리시는 형법이 정당하고, 설혹 한 번도 범죄한 적이 없다 해도 자신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끊어 내심이 마땅하다고 시인한 적이 있습니까?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한다면 여러분은 분명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원죄의 무게를 느껴 본 적이 없다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원죄야말로 진정한 회심자에게는 가장 무거운 부담이며 근심거리입니다. 심령에 거하는 죄는 회심한 사람의 짐이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짐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이렇게 외칩니다.

“아! 내 심령에 거하는 이 부패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것보다 더 불쌍한 영혼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심령이 부패했으며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저주를 내려야 마땅함을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면, 설령 여러분의 심령에다 아무리 평안하다 말한다 해도 거기에 참된 평안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평안은 얻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은 죄와 본성의 죄로 번민해야 하지만, 자신이 행한 최선의 노력과 선행이라는 죄에 대해서도 아파해야 합니다. 주님이 두려운 분임을 깨닫게 될 때 행위의 언약 아래 태어난 우리가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다시금 행위의 언약 아래로 달려가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숲 속에 숨어서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 벗은 몸을 가렸듯이,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선행과 공적에게로 냉큼 달려가 하나님을 피해 숨고 자기 의를 기워 댑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합니다.

‘나는 이제 선하게 될 테야. 기필코 달라질 거야.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서라도 말야.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겠지.’ 하지만 여러분이 드리는 가장 고상한 기도조차 하나님께는 영벌을 내려 마땅한 죄에 지나지 않음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선행, 선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분의 모든 의를 더한다 해도 결코 하나님께 호감을 주지는 못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자비를 내리게 할 만한 동기부여나 유인책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여러분의 의가 더러운 누더기나 피 묻은 옷에 불과합니다.(사 64:6) 여러분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고자 그것들을 하나님께 가지고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미워하시고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선행 가운데 하나님께 내놓을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간성은 본성적으로 의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만 번이라도 영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런 마당에 우리에게 무슨 공적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질상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육신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진정한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본성 이상의 것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어떤 것도 믿음으로 행할 수 없고,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 14:23)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심하고 새로워진 후에도 우리는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가 거하고 모든 행위에 부패함이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회심한 다음이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행에 따라 우리를 받아 주셔야 한다면 우리의 행위가 도리어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조차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함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기도하면서도 죄를 짓고 말씀을 전하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죄짓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가 한 회개에 대해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제가 흘린 눈물 또한 주 예수님의 보혈로 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행한 선한 일들은 그 만큼 많은 화려한 죄악들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참평안을 얻으려면 여러분의 원죄와 실행죄뿐 아니라 여러분의 의와 선행과 공적 모두에 넌더리를 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먼저 있지 않고서는 자기 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심령에서 뽑아내야 할 최후의 우상입니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굴복하도록 그냥 두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의로움이 없다고 느끼지 않으면, 자신에게 있는 의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여러분은 정녕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대단히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것과 실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혹시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에게 의가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느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주님, 제가 행한 선한 일들은 주님께서 영벌을 내리셔야 마땅한 일일 뿐입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평안하다고 아무리 말한들 거기에 진정한 평안은 없습니다.

참 평안은 얻기 위해서 여러분이 크게 뉘우쳐야 할 구체적인 죄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아쉽게도 그 죄가 무엇인지 아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에서 횡행하는 끔찍한 죄이지만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 거의, 아니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이 결백을 주장하는 그 죄는 불신앙입니다. 참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심령에 거하는 불신앙을 뉘우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 교회 마당에 모인 여러분 가운데 누가 불신자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국가인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안식일마다 교회에 가는 데 말입니다. 좀더 자주 집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성찬에 참석한 여러분, 이렇게 성찬에 참석한 증거도 있고 가정에서 꾸준히 기도도 드리고 있는데, 누가 감히 여러분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지 의심한다 해서 제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 대다수의 믿음이 마귀의 믿음보다 못한 믿음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심히 우려가 됩니다. 저는 우리 대부분보다 마귀가 성경을 더 잘 믿는다고 확신합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습니다. 그 점에서는 마귀가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심지어 마귀는 믿고 떨기까지 합니다(약 2:19). 그 점에서 우리 중 많은 사람들보다 더 낫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성령께서 마음에 일으키시는 진정한 신앙으로 오해합니다. 성경이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교회에 가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저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믿는 일, 그저 성경이라는 책이 있다고 믿는 일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저나 알렉산더 대왕은 실존인물로 믿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성경은 거룩한 창고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버젓이 우리 앞에 있는데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살아 계신 성령께서 심령에 두신 참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얼마나 되는지 혹시 제가 여쭤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그런 질문을 했다면 여러분 대부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왔노라고 답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지 않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답만큼 여러분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어머니 뱃속처럼 아주 어린 시절에 성별된 경우라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언제부터 하나님을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릴 때부터 언제나 그랬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을 미워한 적도 없고 하나님께 앙심을 품은 적도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어릴 때 죄 씻음을 받은 것이 아닌 이상,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부분에서 좀더 까다롭게 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고 착각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현혹되기 쉬운 기만이고, 또 실제로 거기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셜목사님이 들려준 경험담에 주목하십시오. 그분은 생명을 얻고자 열심히 살았으나 평안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모든 죄를 십계명 항목에 따라 낱낱이 적어 넣고는 목사님에게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청년 마셜의 죄에 대한 목록을 살펴보더니 거기에 불신앙의 죄가 빠졌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 우리의 불신앙을 알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7-9).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신앙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적이 있습니까? 불신앙으로 굳어진 마음을 애통해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심령에 ‘주님, 제게 믿음을 주소서’ ‘주님, 제가 당신을 붙들게 하소서’ ‘주님, 당신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소서’와 같은 기도가 담긴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식의 깨달음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달라고 부르짖게 해 주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평안하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일깨우시고 너무 늦기 전에 견고하고 참된 평화를 허락하시기 원합니다!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습니다. 참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실행죄와 원죄, 자기 의와 불신앙의 죄를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만한 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다시 한번 말하건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평안이 찾아 올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씀은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쉬게 하리라는 약속은 와서 믿고 그분을 자신들의 하나님, 자신들의 모든 것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하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하며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를 절실히 깨달아야 하고, 그래서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우리 영혼이 그분의 공로를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당신을 주셨습니까? 살아 있는 신앙으로 그리스도께 다가가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느끼고, 여러분의 심령에 평안을 전하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평안이 강물처럼 흘러 넘친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평안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요 14:27)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을 이러한 일들을 반드시 체험해야만 합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내용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죄인의 심령에서 일하셔서 그 마음에 신앙을 갖게 하시는, 영계에서 벌어지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여러분의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느냐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여러분은 정말로 편안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귀가 여러분을 하나님을 모르는 혼수상태에 빠뜨려 안심하고 깊이 잠들게 했는지도,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여러분을 묶어 두려는 속셈인지도 모릅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심연이 자라 잡은 뒤에 혀를 식혀 줄 물 한 방울만 달라고 영원토록 부르짖어도 얻지 못하게 될 그때(눅 16:24, 26).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려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 너무나 두려운 일 아닙니까.

이제 저는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각각 말씀드리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없는 자비를 내리셔서 이 적용을 축복하시기를! 여러분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분들로 계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당신이 한 말을 모두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죄들을 깨달았고, 우리의 원죄를 깨달았으며, 자기 의를 깨달았고, 우리의 쓰라린 불신앙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서 주신 참 평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 그렇게 말할 쉬 있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저는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왔던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했던 대로 여러분에게 인사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주님, 우리의 의

 

주님, 우리의 의”(23:6)

 

인간의 마음에서 파괴해야 할 최후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성, 특히 그 마음의 성향을 잘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라고 답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행위의 언약 아래 태어났기에 행위의 언약을 지켜 구원을 받고자 노력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 너무나 교만해져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위에 어떻게든 자신의 노력을 보태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천주교에게 가하는 강도 높은 비판은 아주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천주교인과 같습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모두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육에 속한 자(고전 2:14)들이 인간의 공로를 더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행의 공덕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서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사도 바울의 탁월한 표현처럼,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고” 옛날 바리새인들과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으려”(롬 10:3) 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안타깝게도 어느 시대에서나 접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는 시대를 불문하고 비판해야 마땅합니다. 특히 물밑에 가라앉은 앙금처럼 탁한 이 시대에 자기 의란 아무리 비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성직자들에게도 있습니다. 한때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강력히 선포하던 강단에서조차 많은 목회자들이 은혜의 교리, 특히 예수님의 온전한 의를 더 이상 전하지 않게 되었으며, 전한다 해도 구색 맞추기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 버렸습니다. 사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무덤에 있는 신앙의 선조들이 벌떡 일어나 불호령을 내릴 만큼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천사들도 알기 원하는 크나큰 신비이자,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옷은 성도들의 심령이 덧입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에 대한 상징이 아닙니까? 그 옷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당시는 아직 사람들이 짐승을 잡아먹기 전이었으므로 그 짐승은 희생 제물로 죽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희생 제물로 죽은 짐승들은 곧 위대한 희생 제물로 죽으실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을 잡아 만든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시는 장면은 벌거벗은 그들의 수치가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로 덮이는 모습을 보여 주는 셈입니다.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는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는 말씀을 상기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든 잎사귀 치마가 아니라 어린양의 가죽으로 수치를 가릴 수 있었듯이, 아브람 역시 믿음으로 인해 그의 죄가 가려졌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의미가 바로 율법과 선지자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며, 특히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주님, 우리의 의” 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 내용입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맨 먼저, 여기서 주님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어떻게 인간의 의가 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인간의 의가 되신다는 교리에 대해 흔히 제기하는 주요 반론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번째로, 이 교리를 부정하는데서 생겨나는 아주 나쁜 결과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 모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와서 예레미야 선지자와 함께 “주님, 우리의 의”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권면하며 설교를 맺겠습니다.

먼저 ‘주님, 우리의 의’에서 주님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호기심에서 제 말을 한번 들어 보려고 아리우스주의자나 소시니주의자가 와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죄인들을 사신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모두가 동의하듯이 여기서 의로운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또한 그분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주(主) 이십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할 다른 본문이 없다 해도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주’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께 해당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심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난외주를 보면, ‘주’라는 단어가 원문에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이름인 여호와라고 나와 있습니다(개역 성경에는 이를 밝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리우스주의자 여러분, 나아와 성자 하나님께 입 맞추고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을 높이십시오. 여러분이 성부 하나님을 높이듯이 말입니다. 천사들과 샛별들에게서 배워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경배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소시니주의자 여러분, 그러면서도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구원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은 지금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분은 그저 “육신의 팔”에 불과할 것입니다(대하 32:8). 그리고 성경은 “혈육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렘 17:5)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는 없기를 바랍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러한 어리석은 주장을 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그런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라는 단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본다면, 여기서 그분이 친히 여호와라는 칭호를 취하셨으므로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심으로 찬양했듯이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고후 11:31)이십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어떻게 인간의 의가 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방법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전가(轉嫁)입니다. 만물을 능력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이 얼마나 낮아지셨는지 모릅니다. 영원히 거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아담과 그 후손에게 영원한 복종만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친히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 즉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불멸과 영생을 주시겠다는 내용을 담은 언약이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하나님의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계속 순종하고 선악과를 먹지 않는 한 아담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과 하와가 이 언약을 어기게 된 과정과 그로 인해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자신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필요하게 된 경위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여전히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습니다. 불순종한 이후 그들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지만, 주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계속해야 했고 그것도 완벽하게 해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인류애를,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심을 보여 주는 놀라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보십시오. 성부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인간을 대신해서 떠맡으십니다.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6,7)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셔서 우리 대신에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성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대속하셨고,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순종하시고 고난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의를 전가 받는 모든 자들을 위해 온전하고 완벽하고 충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뿐 아니라 능동적인 순종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 말할 때 수동적인 순종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죽음’만 말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능동적인 순종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삶도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그분의 죽음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더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처럼 완벽한 구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고난당하셨을 뿐 아니라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그들 대신 순종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합해 온전한 의를 이루며, 그 온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우리의 첫 조상들이 저지를 불순종이 전가되어 우리의 불순종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을 비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 다른 곳(고후 5:21)에서 같은 취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표현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우리가 이런 의미로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이 “그 성[교회를 말합니다] 은 [그리스도의 의가 교회에 전가되어]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는 저자표기)는 예레미야 33장 16절 말씀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의 전가’ 교리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교만한 마음은 이 가르침에 대해 많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제 저는 세 번째로,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반론 몇 가지에 답해 보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의 수호자라도 되는 듯이, “의의 전가 교리는 선행을 저해하며 방탕함을 조장한다” 고 말합니다. 보통 이러한 반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믿음이 충만하고 선행에 진정 관심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극소수 예외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마음이 부패하고 믿음을 저버린 일로 악명 높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붙여 줄 수 있는 최고의 별명은 불경한 도덕가, 아니면 허울뿐인 도덕가입니다.

현재 경험하고 있는 바로 보나 과거의 역사로 보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에 대한 교리를 무시하고 매도하는 곳이야말로 불법이 가장 성행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은 지금도 매한가지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반(反)기독교적인 생각이기에 과거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언제나 반(反)기독교적인 결과들을 낳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교회에 일어났던 개혁은 항상 의의 전가 교리를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 루터(Luther)는 이 교리를 ‘교회의 존폐를 가름하는 가르침’(articulis stantis aut cadentis ecclesiae)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이 교리를 전했던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나 사기꾼들 같은 반대자들로부터 낙인이 찍혔지만, 각 교리의 주창자와 추종자들의 실제 생활을 근거로 이 교리의 정당성을 판단한다면 모든 면에서 그들이 반대자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은혜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이 교리도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았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면서도 정작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생활을 하는 바람에 주님의 원수들에게 이와 같은 비방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론은 신뢰하기 어렵고 매우 부당한 논증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의의 전가라는 이 교리가 선을 행할 이유를 없애 버리는가, 정말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담대하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에 따르면 행위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또 이 교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증거로 선한 일을 행하여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의인 됨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의의 전가 교리가 어떻게 방종에 이르는 교리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모두가 비방에 불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러한 반론을 내세우는 불신자를 소개합니다(로마서6장).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영혼으로 체험하지 못한 불신자만이 그런 주장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더불어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 고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그리고 그 졸개들이 사탄을 흉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종종 빛의 천사로 가장을 합니다(고후11:14). 자신들의 반론을 그럴듯하게 치장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우리 구주께서는 그런 교리를 전하신 적이 없다. 구주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도덕에 대해서만 말씀하신다. 따라서 의의 전가 교리는 근거 없는 교리이다.” 그러나 이 반론을 내놓는 사람들은 주님의 산상수훈을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했거나 설사 읽었더라도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산상수훈에서는 의의 전가 교리를 너무도 확실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눈이 달렸다면 뛰어가면서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하게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정으로 도덕과 선행을 강조하시면서 (모든 신실한 목회자들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꽤나 학식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덧붙여 놓은 부패한 겉치레를 율법에서 벗겨 내십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예수님은 내면의 경건, 예를 들면 가난한 심령, 온유함, 거룩한 슬픔, 청결한 마음, 특히 의를 향한 갈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선행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분의 의를 전가 받았다는 증거, ‘이러한 은혜와 하나님의 성품’을 전해 받았다는 증거로 말입니다.

“너희 빛[제가 앞에서 말해 왔던 하나님의 빛을 말합니다]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저자 표기).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생활의 규범으로서 갖는 효력]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율법의 의미를 온전히 밝혀 주시러]함이로다” ([]는 저자 표기).

그 다음 예수님은 도덕법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의의 전가를 던져 버리는 대신 의의 전가를 확증하여 주시고 어리석은 자들이 앞에서 주장한 반론에 답하십니다. 우리 영혼이 의를 전가 받은 증거로 선행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의” 이십니다! 그러나 사탄이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공격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탄은 성경을 인용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할 때마다 그 시험을 성경으로 정당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자녀들도 사탄의 가르침을 똑같은 방법으로 옹호합니다. 그들은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을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찾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한 청년이 그리스도께 달려와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율법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러므로 행위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칭의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결과적으로 의의 전가 교리는 비성경적이다.” 이상이 반론의 골자인데 그다지 대수로운 반론은 아닙니다. 의의 전가 교리가 불가파하다고 증명하려 할 때 이 본문만큼 좋은 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이 청년과 그를 대하는 주님의 행동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0장 17절입니다. 마가의 기록을 들어 봅시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하나 사람이 달려와서[그와 같은 귀족이 그리스도께 달려가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었을 것입니다!]꿇어 앉아[당시 그 정도 계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무릎꿇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진정 당신을 참하나님으로 믿는 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물어보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곧바로 그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청년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습니다. 즉, 영생은 그의 행위로 얻을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에게 계명을 말씀하신 이유는 의의 전가를 반대하는 자들이 말한 취지와는 달랐습니다.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계명을 말씀하셨던 이유는 율법을 개인교사(갈3:24)로 삼아 그 청년을 당신께로 이끌어 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청년이 이 계명 모두를 다 어겼음을 깨닫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뒤, 마침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더 나은 의를 찾아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로 가득 차고 스스로를 의롭다 여긴 이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제대로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이 모두를 제가 어릴 때부터 어겼나이다.”

실제로 그가 한 번도 간음한 적이 없다고 해도 정말로 단 한 번도 여자에게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적이 없겠습니까? 실제로 그가 아무도 죽인 적이 없다 한들 한 번도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경솔한 말을 한 적이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사소한 계명을 조금이라도 어겼다면,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가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3:10).

그러므로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주님이 그 청년을 그렇게 대하신 까닭은 의의 전가 교리에 반대했다기보다 그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은 아마 또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를 인간적으로 사랑스럽게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젊은이는 예수님의 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놀라고 슬피 우시며 “오, 네가 알았더라면” 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을 보여 주는 대목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청년을 사랑하신 그 사랑과 마리아와 나사로, 마르다에게 주신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라면 말씀에 귀기울여 열심히 듣고 공공예배때 예의 바르게 처신하며 외적으로 흠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과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사람에게 느끼는 영혼의 교감과 공감,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사랑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빈약한 예이기는 하지만 이 사례를 우리 주님의 경우에 적용해 봅시다. 이 청년에 대해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내리신 평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반론에 동의하는 여러분도 의기양양해 하기는커녕 이 청년처럼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청년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답변은,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바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 는 주장이 진실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더 강하게 확신시켜 줄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반론이 남았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근거한 이 반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 주님이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벗은 자들을 입혔던 사람들을 영생으로 보상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원인이었다. 결과적으로 의의 전가 교리는 성경과 부합하지 않는다.” 저 역시 이 주장이 성경 본문을 근거로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해 내세우는 반론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반론임을 인정합니다. 아무래도 영국 성공회 39개 신조의 한 부분이 이 반론에 명쾌하고 간결하게 답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선행이 우리를 의롭게 해 주지는 않지만 칭의 다음에 그 열매로서 선행이 따라올 것이다. 선행 자체는 보상을 요구할 수 없지만 그 선행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거듭난 영혼에서 나오는 한, 선행에 대해 응분의 보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러한 선행을 더 많이 쌓을수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의 상급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 말을 염두에 두면 우리 앞에 놓인 반론에 대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태는 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상을 주리라. 너희가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했으며, 그러 인해 나의 참된 제자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유가 선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음은 명백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이러한 어투의 질문들이 자기 자신의 의에 의지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론자들은 또다시 이렇게 응수합니다.

“그 다음 후반부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거절하고 영벌을 내리신다는 내용이 분명히 나와 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지 않은 자들을 벌하신 반면 선을 행한 자들을 구원하신다. 결과적으로 의의전가 교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가장 사소한 도덕법의 의무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벌을 내리시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해도 어떤 보상을 해 줄 의무는 없으십니다.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채 다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말이 가장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잇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 나왔던 오른편에 앉은 경건한 영혼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점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행위로 의로워지기를 기대하기는커녕, 우리 주님이 자신들이 베푼 선행을 다 말씀해 주시고 게다가 부족하기만 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에 대해 보상까지 해 주시자, 말하자면 거룩한 쑥스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라는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틀림없이 거룩한 분노로 들고 일어설 것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본 것으로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몇 가지 주요 반론에 대해 충분히 답변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설사 여기서 멈춘다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8:37)고 말할 수 있지만 제가 즐겨 사용하는 논증 방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저는 항상 이 방식이 대단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토론의 대상이 되는 특정 명제를 부정할 때 생겨나는 불합리함을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네 번째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교리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불합리함은 다른 어떤 교리를 부정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많습니다.

먼저, 이 교리를 부정하면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만들고,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뒤엎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자랑하는 자는 주님을 자랑하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가 하나님과 내가 화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아니라면, 내가 했던 과거의 선행 또는 앞으로 행할 선행을 조금이라도 그분의 의에 보태야 한다면, 혹은 그러한 나의 선행 때문에 하나님이 내 영혼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거나 나의 선행이 하나님의 용서를 유도하는 무엇이라도 된다면,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 무엇인가 자랑할 거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役事)에는 우리가 자랑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의 전가 교리를 거부한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이 교리가 거짓이라면 얼마나 많은 성경 본문이 거짓인지 끝없이 세어 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우리는 의의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일이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일시에 부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점만 분명히 해 두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든지 아니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말한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이 설교의 초두에서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요 천주교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군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천주교로 가는 뒷길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의의 전가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진정 천주교인이며 또 그렇게 불려야 마땅하다고 단언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만약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성인(聖人)들에게 기도해야만 성인들이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해 줄 거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저를 천주교 선교사라고 부르며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분명 여러분이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의 중보는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중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성인들의 중보를 보태려는 것은 분명 신성모독입니다.

만약 제가 좀 더 멀리 나가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는 아무래도 우리를 구원하기가 부족해서 거기에 우리의 죽음을 보태야 한다고 말한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처럼 죽어서 여러분의 죽음을 그분의 죽음에 보태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거룩한 분노에 사로잡혀 하늘에 재를 뿌리며 저를 ‘이상한 교리를 퍼뜨리는 자’라고 부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중보가 불충분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중보에 성인들의 중보를 보태려는 시도가 진정 불합리하고 불경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충분하다는 듯 우리의 죽음을 그것에 보태려는 시도가 불합리하고 불경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판단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순종이 불충분한 것처럼 거기에 우리의 순종을 보태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불경한 시도 아닙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주님이 하나님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을 하셔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얼마나 불합리한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이 교리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불합리함을 한 가지만 더 언급해 보겠습니다. 어떤 성직자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많은 논증을 펼쳤으나 끝내 로체스터(Rochester)백작에게 지옥이 정말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데 실패하자 다음 몇 마디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각하, 지옥이 없다면 저는 안전합니다. 그러나 만약 지옥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면 각하께서는 어떻게 되시겠습니까?” 저는 이 예를 의의 전가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의의 전가 교리 같은 것이 없다면 그 교리를 고수하고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리가 존재한다면(물론 존재합니다) 그 교리를 부인하는 여러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분명 여러분의 운명은 영원토록 타오르는 불과 유황의 바다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행위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는 성소의 저울에 달려 그 모자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행위로 여러분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난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영혼을 소멸하는 불이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뉴 잉글랜드 노스햄턴(Northhampton)의 위대한 스타더드(solomon Stoddard) 목사님은 자신의 책 (이 기회에 일독을 권합니다) 제목을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 심판대 앞에 설 때의 안전함”(The safety of appearing at the Day of judgement in the Righteousness of Christ)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처럼 결코 흔들리지 않는 만세(萬歲)반석 위에 설 수 있는데 누가 부러진 갈대에 기대겠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저는 오늘 여러분께 외칩니다.

“학자여, 어디 있습니까? 변론가여, 어디 있습니까?”(고전1:20).

이 시대의 합리적인 불신자들이여,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제시하는 의의 전가 교리 이상으로 합리적인 가르침을 여러분의 논증으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을 말씀과 더불어 느껴 본 적이 정녕 없습니까? 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분이 여러분의 의가 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저는 여러분의 양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의의 전가 교리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이 교리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대부분은 이 교리를 소중히 여기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논리적으로도 하자가 없고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불시에 내려온 축복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교리를 더욱 흔쾌하고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은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의” 라고 말입니다. 이 교리를 머리로만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해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형벌만 더 가중시킬 뿐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미 몇 번 말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고백하는 도마와 더불어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요20:28).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실 뿐 아니라 거룩함이 되십니까? 본문에 기록된 “의”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뿐 아니라 우리 안에 일어나는 거룩함도 뜻합니다. 의와 거룩함,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합쳐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 둘을 결코 분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게 된다면 여러분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런 의미로 “주님, 우리의 의”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저지를 실행죄와 원죄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고, 선지자 이사야의 멋진 표현처럼 “여러분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기”(사64:6) 때문에 자신의 의에 염증을 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의가 온전함을 깨닫고 그 의를 흠모한 적이 있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내 영혼이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갈망합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까? “오, 언제 그리스도의 의에 힘입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꼬! 그리스도밖에 없네! 그리스도밖에 없네! 하나님이여, 제게 그리스도를 주소서. 그러면 저는 만족하겠나이다! 제 영혼은 당신을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서 이런 고백이 나온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내적 갈등을 거친 뒤에 믿음의 팔을 내밀어 복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여 “임은 나의 것, 나의 임의 것”(아2:16)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구이건 두려워 마십시오. 만세! 모두만세! 기뻐 뛰는 영혼들이여! 주님, 주 그리스도,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의롭게 하셨으니 누가 여러분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시고 영원히 사셔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롬8:34).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 것이고(롬5:1), 머지않아 예수님과 영광 가운데 함께 거하게 될 것이며, 영원하고 형언할 수 없는 몸과 영혼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바울도 아볼로도, 생명도 죽음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고전3:22,23). 형제들이여, 제 마음이 여러분을 향해 활짝 열렸습니다!(고후6:11). 오, 여러분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신다면 여러분은 그 의를 끊임없이 고백하고 전하십시오.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그 의를 외치십시오.

오, 말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의를 전하십시오! 이 의를 주신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이 의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믿는 분을 온 세상에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열매로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과 여러분이 천국에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분의 피로 씻겨 주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듯이 여러분도 거룩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비방받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예수님이 친구의 집에서 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매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십시오 (벤후 3:18).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 사랑을 명심하고 순종하십시오! 많이 용서받았으니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물으십시오.

"주님의 의를 제게 주신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하겠나이까?" 겸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질문이 여러분의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왜 저입니까, 주님? 왜 저를? 다른 사람들은 남겨졌는데 왜 저를 택하십니까? 왜 주님이 저의 의가 되십니까? 당신의 손에 정죄받아 마땅한 저를 어찌하여 구원해 주셨습니까?"

여러분,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으로 깊이 느낍니다. 이제 여러분을 축하하는 데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의 의를 영접하고 생명을 얻으라고 초청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 지금 제 마음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여기 제 앞에 얼마나 많은 소중한 영혼들이 있습니까! 이 영혼들은 참으로 잠시잠깐이면모두가 영원으로 들어가겠지요! 그러나, 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에 대고 물어보신다면, 진정으로 "주님은 우리의 의"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적을지도 모른다니 말입니다. 오,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고도 심판 날에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여러분이 입고 가야 할 결혼 예복입니다. 오, 그리스도를 모르는 죄인들이여, 여러분 때문에 저는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 때문에 제 영혼의 소원이 늘어났습니다. 오, 지금이 합당한 때라면,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에 적합한 때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죽어서 여러분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한다면 여러분은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에게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분 앞에 서도록 부르실 때, 여러분이 자신의 의라고 부르는 초라한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여러분의 벗은 몸을 가려 주지 못할 것입니다. 아담은 그러한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여러분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오,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세상이 끝나는 그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살려 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을 만드신 분은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저주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갈"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히 타는 불에서 살 수 있습니까? 정녕 여러분의 살이 놋이고 여러분의 뼈가 철입니까? 설사 그렇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준비된 지옥불은 여러분의 살과 뼈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정녕 그리스도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부재 앞에 통곡하며 희망 없이 어둠 속을 헤맸던 신앙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하나님의 부재는 겨우 몇 시간, 길어야 며칠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그들이 하루 종일 엉엉 울면서 하나님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십시오.

겨우 하루 동안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어도 그렇게 두렵다면 영원히 그리스도께 쫓겨나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은 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영원토록 지옥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을 고통이 가득 찬 장소로 보내실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저는 벌써부터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엾은 죄인들이 떨면서 하나님의 법정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우리가 지옥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다른 천사가 형을 선고하게 하소서."그러나 소용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지옥형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 그리스도와 화해하라고 간곡히 권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의"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그분께 매달리십시오. 주님이 자비를 베푸실지, 아니 여러분을 용서하실지 누가 압니까?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시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크고 많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입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죄인 중의 괴수입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믿었다가 타락한 죄인들 입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당신의 풍성하고 값없는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그러니 서둘러 돌아오십시오.

청년들이여, 여러분이(한때 제가 그랬던 것처럼) 탕자와 같은 생활을 하며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습니까?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의 돼지우리를 떠나 어서 돌아오십시오. 얄팍한 육욕에 더 이상 빠져 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의 천부께서 지금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거기에 가장 좋은 옷,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또 보고, 또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비싼 값을 치르고 그것을 사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피 흘려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여러분은 멸망하고 파멸하고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십시오.

죄지은 탕자들이여, 집으로 돌아오십시오. 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의 형과는 달리 여러분이 돌아온다고 화내지 않을 것입니다.(눅 15:11-32). 아니, 아닙니다. 그보다 저는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너무도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출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 이제라도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내려오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려오소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내려오소서. 당신께서 제게 그토록 큰 자비를 베푸셨던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젊은 탕자들에게 성령으로 당신의 의를 덧입게 하소서! 그들의 벗은 영혼을 당신의 의의 옷으로 입혀 주옵소서! 청년들뿐 아니라 젊은 여성들에게도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몸단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이 벌거벗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 중에 주님은 나의 의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토록 귀중한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덧입기를 구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의가 없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회칠한 무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젊은 여성들이여, 이제 여러분이 걸쳐야 할 유일한 장신구를 기억하십시오.

오직 주님만이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니라 타는 불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년의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바쁜 상인들과 분주한 마르다들이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님을 여러분의 의로 받지 못하셨습니까? 맙소사! 여러분이 이토록 값진 진주를 갖지 못한다면, 해 아래 여러분의 모든 수고가 무슨 유익이겠습니까? 주님의 의가 그토록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다른 모든 소유들이 여러분을 떠날 때 정작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주님의 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해 안달하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영생을 안겨 줄 의 말입니다.

이 자리에는 백발의 어르신들도 보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주님을 나의 의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 백발의 죄인들이여, 저는 여러분을 붙들고 울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면류관이 되고 여러분이 자랑해야 할 백발이 여러분에게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서두르십시오. 노년의 죄인들이여, 서두르십시오. 그리고 구속하시는 사랑을 구하십시오! 안타깝게도 여러분은 한쪽 발을 이미 무덤에 디디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기한은 다했고 여러분의 해는 이제 지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아니라면 그 해가 지고 난 후 여러분은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아나십시오! 달아나서 여러분의 생명을 건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문을 두드린다면 그것이 설혹 밤 열한 시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내쫓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시기를 구하고, 나이 든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는지 알려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십시오!(요 3:3) 또한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먹이라는 것이 우리 주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의가 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제가 말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제게 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이여, 그리스도께 오십시오. 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실 것입니다.

자신이 너무 어려서 회심할수 없다고 간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아홉 살이나 열 살이 되어서도 주님이 우리 의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보다 어린 친구들이 이미 그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아직 어릴 때 오십시오. 여러분은 오래 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망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으려 한다면 혼자서 나오십시오. 여러분은 어리지만 주님이 어떻게 여러분의 의가 되시는지 부모님에게 보여 주어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어린양입니다. 그분이 제게 여러분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늦기 전에 여러분이 주님을 여러분의 의로 삼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기에 앞서 흑인 형제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결코 잊을 수가 없지요. 제가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의 영혼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깊이 간직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시도록 구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나 여자도, 노예나 자유인도 없습니다(갈 3:28).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간다게 여왕의 내시에 대해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행 8:26-39). 여러분처럼 그도 흑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의가 되셨고 그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시기에 여러분을 당신의 피로 씻어 주실 것입니다. 집으로 가셔서 오늘 본문 말씀을 기도로 바꾸어 주님께서 여러분의 의가 되시도록 간청하십시오. 주님,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속히 우리 모두의 영혼에 들어오소서. 아멘, 주 예수여, 아멘, 아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오늘 본문을 읽고 나니 한밤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했던 말을 여러분에게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보십시오.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게 구원자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첫번째 약속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약성경에서만 찾을 때가 많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천지창조 때에 근접할 만큼 역사가 깊습니다. 잘 살펴보면 하나님은 놀라울 만큼 차례차례로 당신의 아들을 인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구원자에 대한 첫번째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선택받은 자들은 그 약속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 하나님은 인류의 구속에 관한 당신의 영원한 뜻을 아브라함에게 더욱 드러내셨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번에 걸쳐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구원자에 대해 말씀하셨고, 마침내 주 예수께서 친히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히1:1). 사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광명에 비하면 우리의 첫 조상들에게 주신 첫번째 약속은 희미한 불빛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불빛에 불과할지라도 분명히 그들은 그 불빛에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두었고 그런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아담과 하와가 어쩌다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는지, 또 이 약속의 범위와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류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모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타락했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그 뻔뻔스러움으로 자신들이 타락한 인간임을 증명합니다. 심지어 이교도들조차 인류가 타락했음을 인정하고 슬퍼하는 이 마당에 말입니다.

하지만 이교도들은 인류 전체에 흐르는 부패의 물결은 보았으나 그 근원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계시하시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이 왜 타락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창세기 3장에 밝힌 사실은 전 인류가 자력으로 아무리 연구한다 해도 결코 알 수 없었을 내용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과정과, 특별히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문제를 놓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회의를 열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회의한 결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26,27).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원형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게 했습니다.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짧은 표현으로 그토록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면서도 이 점을 딱 두 번만 반복합니다. 그것도 지나가는 말처럼 말입니다. 모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명예롭게 지으셨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도 빨리 타락하여 멸망할 짐승처럼, 아니 마귀처럼 되어 버렸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이다."사실 사람이 창조된 지 얼마나 지나서 타락했는지 정확하게 성경에 기록된 바가 없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그냥 모른다고 해 두겠습니다. 다만 사람을 창조한 바로 그 당일에 사람이 타락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을 반박할 기록 정도는 성경에 있다고 봅니다. 창세기 2장에 하와를 창조하고 짐승들의 이름을 지으며 하나님이 마련하신 에덴동산에 아담을 두시는 등 많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일들이 다 일어나려면 적어도 하루보다는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온전한 상태로 그리 오래 남아 있지 못했다'는 데에는 모두들 동의합니다. 물론 그 '오래'가 얼마나 되는지는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주제는 사람이 온전한 상태에서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으며, 그를 사로잡은 유혹이 어떻게 일어나고 진행되어 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이것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서 뱀이야 진짜 뱀이었겠지만 말하는 자는 바로 마귀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마귀를 옛 뱀으로 부르게 된 듯합니다(계 12:9,20:2). 마귀는 뱀의 몸을 빌려 우리의 첫 조상들을 속이러 왔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행복을 시기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면, 인간이 타락한 천사들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만드셨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그럴 마음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유혹받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은 정당하시며, 인간이 타락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어떻게 인간이 타락하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까? 직접 인간을 타락시킬 힘은 없었기 때문에 사탄은 다음과 같은 꾀를 내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한 뱀의 몸을 빌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리하기 이를 데 없어도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마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기계 장치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간교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은 더 약한 그릇(벧전 3:7)인 하와가 남편과 떨어져 혼자 있을 때, 그러니까 좀더 공략하기 좋을 때를 틈타 이렇게 말을 걸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이 말은 마귀가 이미 입수한 정보, 또는 목격한 상황에 근거해 던진 질문이 틀림없습니다. 십중팔고 하와는 그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근처에 있었을 것입니다.(잠시 후 그녀가 나무 열매를 따 먹는 정황으로 봐서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와는 그 나무를 쳐다보면서 도대체 그 나무에 뭐가 들어 있기에 자신과 남편이 그 나무 열매를 맛보면 안 되는지 궁금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탄은 하와를 대화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우리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사탄에게 저항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사탄은 상당히 우세한 위치를 점하게 됩니다)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탄이 한 첫번째 일은 가능하다면 하와가 하나님에게 불쾌한 마음을 갖도록 꼬드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저런! 하나님이 동산을 마련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 너희를 두신 이유가 너희들을 놀려 먹고 당혹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보구나. 동산을 마련하시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게 하시다니."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언제나 이런 식으로 다루신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입니다. 아마도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이 질문보다 더 적합한 질문은 없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여기서 하와가 하나님이 선하신 분임을 옹호하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2,3절입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정말이지 답변의 첫 부분은 좋았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속뜻을 살피면서 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하나님이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시지는 않았다.(아마도 생명나무도 먹을 수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명나무는 죄 없는 인간에게 성찬과도 같았으니까요)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하나뿐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죽을지도 모르니 그 열매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그런데 여기서부터 하와가 틀어지기 시작하고 죄가 그 마음에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뱀과의 대화로 뱀의 해독에 이미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와는 애초에 뱀과 대화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 질문을 던져서 하나님에 대한 불경한 생각을 심어 주는 것으로 보아 뱀이 선한 존재가 아님을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정말이지 하와는 즉시 뱀에게서 떠나야 했고 뱀과 노닥거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뱀과 대화하여 받은 해로운 영향은 즉시 나타나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즉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하나님이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죄에 대해 내리신 경고를 실행에 옮기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유혹에 빠졌거나 유혹에 넘어가기 시작했다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사탄도 이 사실을 알았기에(4절에서)하와에게 은근하고 교묘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단코, 하나님은 그깟 열매 하나 따 먹었다고 해서 너에게 벌을 내릴 만큼 잔인한 분이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아뿔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탄의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가 사탄의 뜻대로 움직이는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까? 사탄은 그들에게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지옥이 주는 고통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롭기만 한 분이다. 그러니 겨우 몇 년 동안 지은 죄 때문에 영원히 고통받는 형벌을 내리시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엔 하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헛된 소망을 품고 계속 죄를 짓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시는 분임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부정문으로 표현한 말을 긍정문으로 바꿔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음 절과 더 잘 이어집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가하는 이러한 위협은 너희를 노예처럼 영원히 굴종하게 만들려는 속임수요 음모일 뿐이다." 자, 5절을 한번 보십시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산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아무리 낙원이라 해도 하나님이 이와 같이 비방받을 때 그 어떤 하나님의 자녀가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그 순간 하와가 뭔가에 단단히 씌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혹자 사탄이 그런 망발을 일삼도록 그냥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사탄이 그 더러운 입에서 나오는 말로 하나님을 얼마나 심술궂게 그리고 있습니까? "너희가 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는 저자 표기).

따라서 이 유혹의 초점은 그들이 그 열매를 먹으면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우월하지는 못해도 하나님과 동등해져서 더이상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을 필요도 없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도 알게 되리라는 데 있습니다. 하와는 선악을 안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이 그 어떤 대단한 특권을 누리게 되리라는 사실만은 알았습니다. 이처럼 사탄이 제시하는 길은 지금도 죄인들에게는 옳은 길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 길의 막다른 끝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절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뱀 즉, 사탄은 유혹을 도무지 뿌리칠 수 없게 하고자 이 시점에서 나무 열매를 하나 따서 하와가 보는 앞에서 직접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본 하와는 뱀이 다른 들짐승보다 월등하게 영민하고 언변을 갖추게 된 데는 이 열매를 먹은 덕이 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열매를 따 먹어서 뱀이 그렇게 나아졌다면 하와 자신도 마찬가지 유익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말입니다.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라고 말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뱀이 열매를 먹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하와가 어떻게 그 열매가 먹음직한 줄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와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나서 사탄은 재빨리 사라져 버립니다. 이제 하와의 마음에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곧 죄가 생겨나는 법입니다. 또 죄가 잉태되면 죽음을 낳습니다(약 1:15).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사실 우리의 감각은 영혼의 적군들이 상륙을 시도하는 항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욥처럼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다"(욥 31:1)는 단호한 결심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금단의 열매를 눈으로 보고 있자니, 하와는 곧 열매를 따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무를 보아하니 그 열매가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했지만(여기에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이 나타납니다. 요일 2:16) 무엇보다도 지혜롭게,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으로 지혜롭게, 아니 하나님과 똑같이 지혜롭게 해 줄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그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그도 먹었습니다. 처음 죄를 짓자마자 하와는 남편을 유혹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는 데 서로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파멸로 몰아간다니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악을 행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셈이 됩니다. 이처럼 행함과 가르침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죄를 짓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마귀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어쩌면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을 유혹하는 도구가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그런데 도대체 이 한가지 죄에 얼마나 복잡한 범죄들이 얽혀 있는 것입니까! 이 죄에는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 들어있습니다. 이제 막 에덴동산을 조성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영광스러운 사명을 맡기시어 그들을 동산에 두신 창조주께 대한 배은망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삶과 죽음이 결정될 후손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드러납니다. 여기에는 최악의 교만함도 배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율법을 철저하게 경멸했고 오히려 마귀의 말을 믿고 그 말을 따랐습니다. 그 모두가 자신들의 입맛대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한 복합적인 죄는 지상에서 그 누구도 저지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 맞먹는 죄는 마귀의 배신과 반역뿐입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좋습니까!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자신들의 벗은 모습을 보았을 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단지 하나님이 없는, 거룩하고 선한 것을 다 잃어버린, 이전에 누리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신들의 벗은 모습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제 그들의 이름을 이가봇(삼상 4:21)이라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났으니 말입니다. 이 아침의 자손들이 이제 얼마나 깊은 나락에까지 떨어졌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자신들에게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한 자에서 마귀와 야수의 본성으로 떨어졌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벗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벗은 몸으로 그들은 또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께 달려가 용서를 구합니까? 자신들의 벗은 몸을 가릴 수 있는 옷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졌고 세속적이고 육욕을 좇는 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자비를 구하는 대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아니면 허리에 두를 무엇인가)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자연인의 모습에 대한 생생한 묘사입니다. 우리가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벌거벗은 상태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대신 우리 나름대로 의를 엮어서(우리의 첫 조상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었듯이) 그것으로 우리의 벗은 몸을 가리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는 결단코 하나님이 내리시는 엄중한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무화과나무 잎이 아무런 도움도 못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의도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무화과나무 잎을 걸쳤음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는 저자 표기).

아담과 하와는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곧 하나님이신 말씀"(요 1:1), 곧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서늘할 때에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기척을 들었습니다. 이때가 아마 아담과 하와가 매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저녁 제사를 올려드리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날이 서늘할 때에! 아마 그들은 아침 일찍 또는 정오에 죄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즉각 나타나지 않으시고 날이 저물어 서늘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훈계하고자 할 때는 그들이 격정으로 타오를 때가 아니라 날이 서늘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전처럼 기뻐하는 대신, 두 팔을 벌리고 벅찬 가슴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대신, 그들은 지금 동산 숲에 숨어 있습니다. 아이고! 참으로 어리석은 시도가 아닙니까? 그들은 벗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어디로 달아난단 말입니까? 이제 그들은 타락하여 하나님께 적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창조주 하나님과 대화하기 싫어하고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진정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라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벗은 몸을 가리려고 애를 씁니다.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하나님께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사실 이제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은 아담에게 먼저 다가가셨던 것처럼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당신의 은혜로 부드럽게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습니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담은 결코 주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평소처럼 내게 나아와 예배를 드리지 않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이 예배하지 않을 때 주님은 그것을 기록해 두십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빠지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주 하나님께서 "아들아, 딸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또한 우리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이 질문을 차원을 좀 달리해서 좀더 깊이 이해하자면 이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불쌍한 영혼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이것은 주님이 죄인에게 먼저 다가와 그를 당신의 은혜로 불러 구원하실 때, 죄인에게 물어 그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그래서 우리 각자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하며 눈멀고 헐벗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과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속의 가치를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10절을 보겠습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를 지으면 얼마나 겁쟁이가 되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면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너의 창조주이며 입법자]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는 저자 표기).

하나님은 아담이 벌거벗었으며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담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우리의 입술로 당신께 은혜를 구하고 우리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간구와 고백으로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게 되고, 우리 자신에게 죄의 수치를 돌리며 하나님의 크신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12절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정말이지 이제껏 인간의 본성이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된 적이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얼마나 교만해졌는지 보십시오! 수치를 감수하고 잘못을 인정 하는 데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이 대답은 하나님께 대한 오만불손함과 아내에 대한 증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직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서 아담은 교묘하게 하나님을 탓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

이 말은, "하나님이 제게 그 여자를 안 주셨더라면 제가 금단의 열매를 안 먹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자신들의 욕구에다 책임을 전가하며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욕구 말입니다. 그 욕구가 우리를 속이는 바람에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내의 말을 따른 아담을 벌하셨듯이, 하나님은 자신들의 부패한 성향을 따르는 사람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으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담이 마음만 굳게 다잡았더라도 아내의 꼬임에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어려울 때에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히 4:16). 마귀와 우리 속에 거하는 죄가 우리를 유혹하기는 하지만 우리 의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억지로 유혹에 따르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파멸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하나님께 볼멘소리를 하지만 심판의 날에는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아담의 말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만방자함이 드러납니다. 또한 "여자, 이 여자, 그녀가 내게 주었습니다"라는 말에는 아내 하와에게 품은 증오심도 드러납니다. 아담은 모든 잘못을 하와에게 떠넘기고 그녀에 대해 대단히 경멸하는 투로 말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아내, 사랑하는 아내라고 부르지 않고, 이 여자라고 부릅니다. 죄는 이렇게 일심동체라는 부부 사이도 갈라 놓습니다. 죄는 신성한 교제가 깨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이 땅에서 함께 죄를 지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죽으면 영원히 서로를 미워하고 저주하게 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영혼들은 모두 형제들을 비난합니다. 그 점은 죽기 전인 이생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말입니까! 아담은 무려 열두 단어나 사용해 자신을 변명한 뒤 한두 단어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이런 걸 고백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바로 여기까지가 열두 단어입니다. 그리고 "내가 먹었나이다" 이 마지막 말은 정말 마지못해 나옵니다! 정말 빨리도 나왔습니다! "내가 먹었나이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은 교만한 심령은 이와 같아서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심지어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깁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이러한 교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 심령이 깨어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셔서 우리가 회개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리석게도 언제나 하나님만 탓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 번 만 번 옳사옵니다"(시 51:4,공동번역).

이러한 고백은 다윗처럼 자신의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고 진심으로 그 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깨어지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불순종한 책임을 스스로 지기는커녕 아내와 하나님께 전가하기 바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 우려하는 말씀 속에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관심이 나타나고 있습니까!"너 자신과 네 남편, 그리고 네 후손에게 얼마나 엄청난 불행을 끼쳤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마귀에게 순종하고, 아담을 돕는 배필로 만들었건만 오히려 남편을 망쳐 놓다니!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기서 하나님은 하와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자신이 초래한 위험을 일깨우려 하십니다. 그래서 그녀의 귀에 대고 직접, 말하자면 호통을 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죄인들에게는 율법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부상당한 모습을 보고 치료하려 할 때는, 평강이 없는 그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렙 6:14). 마냥 안심하고 있는 죄인에게는 시온 산에 데려가기에 앞서 시내 산의 천둥 소리를 들려 주어야 합니다.

율법을 결코 소리 높여 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역자는 위로의 아들 바나바(행 4:36)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우레의 아들 보아너게(막 3:17,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붙여 주신 별명)가 되어야 합니다.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이 있은 다음에야 엘리야에게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습니까(왕상 19:11,12). 우리는 사람들에게 먼저 유죄라고 선언한 다음에 구원받기 위한 방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율법을 선언하고, 또 언제 구원의 복음을 제시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는 남편처럼 장황하게 자신을 변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아담의 마음처럼 교만합니다.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기서 하나님은 죄를 저지른 하와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와는 감히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모든 책임을 뱀에게 떠넘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 뱀과 대화를 나눈 제가 잘못입니다. 주님, 뱀이 처음 질문을 던졌을 때 곧장 남편에게 달려가지 않은 제가 잘못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적으로 제 탓입니다. 오, 저의 잘못으로 가엾은 남편이 고통받지 않게 해 주세요!" 만약 하와가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녀의 마음에서 이런 말이 우러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똑같이 교만했기에 어느쪽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와가 말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제까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변명하는 부분을 오랜 시간에 걸쳐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잘 드러내 줄 뿐 아니라 구원이 오직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첫 조상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어겼기에 영적으로 죽었고 진노의 자녀이자 지옥의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죄를 물으셨을 때, 그들은 그토록 심각한 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피고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서는 안 될 어떤 이유를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그들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를 지키시면서 어떻게 그 들을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당신의 경고를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마귀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비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이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을 살려 주소서"하는 자비를 요청하는 외침이 들려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당신이 의로우시며 동시에 자비로우실 수 있는 계획을 세우십니다. 당신의 경고대로 실행하셔서 범죄를 처벌하시고, 동시에 범죄자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마음에 품어 오신 그 사랑이 우리 눈에 펼쳐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처럼 교만하고 심지어 단 한 번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즉시 뱀에게 형을 선고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자를 계시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즉, 사탄은 굴욕을 당할 것이며 그 능력은 언제나 제한되고 억제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라"(시 72:9)고 노래합니다. 이제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절을 설명하기에 앞서 <사람의 본분>(Whole Duty of Man)의 저자가 저지른 중대한 오류부터 지적해야겠습니다. 그 저자는 15절 말씀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두번째 언약이 담겨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타락 이후에도 예전처럼 하나님이 아담을 언약 상대로 상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영혼을 돌보는 일과 관련해서 두번째 언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두번째 언약은 하나님이 아담과, 아담 안에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이다. 이 언약은 첫번째 언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와 우리가 수행하는 의무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은 엉터리 신학입니다. 15절 말씀은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로지 뱀을 향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는 한낱 범죄자로서 그 옆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또 다른 언약을 체결할 상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15절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나름대로 의무를 행하는' 그런 언약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값없는 구원을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택한 자들의 구원에 관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은 성자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자신의 씨를 보게 될 것이라고 성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사 53:10).

이제 이 15절 말씀은 성부와 성자간에 맺은 언약을 드러낸 계시이므로 하나님은 더없이 단호하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처음 언약을 맺은 첫번째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두번째 언약이 파기되지 않도록 확실히 보장하시고자, 이 언약을 두번째 아담이신 하늘에서 오신 주 예수님의 손에 맡깁니다.

타락해 버린 아담은 더 이상 우리의 대표자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말하자면 개인에 불과합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이 약속이 선포한 자비를 믿음으로 붙잡는 일뿐이었고, 그러한(실제로 그렇게 붙잡은)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과 순종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은, 순서상 믿음과 순종이 먼저 나오고 구원이 그 다음에 나온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내세워 아담에게 제안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행위의 언약을 맺을 때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상대하셨던 것처럼 아담과 맺으신 언약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제 아담과 하와가 형사 피고인의 입장이 되었고, 어떤 조건이건 충족할 여력이 없는 판국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언약의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에게 믿음과 순종을 주셔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믿음과 순종, 그리고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이 약속 안에서 그들에게 틀림없이 보장된 것입니다. 이 같은 약속의 내용은 탁월한 스코틀랜드 신학자 보스턴(Boston)박사가 자신의 저서 <은혜의 언약에 대한 고찰>(A View of the convenant of grace)에서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이 첫번째 언약과 두번째 언약을 구분하는 것은 절대 불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두 언약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행위의 언약 아래 있기라도 한 듯, 자신들이 이것저것을 해야 하며 또 그런 것들을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배워 왔습니다. 이제 저는 사람들이 진정 배워야 할 진리를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위해 두번째 아담이신 주 예수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인간들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믿음을 구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 수 있는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광스러운 구속자, 영원히 복되신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하신 일을 깨닫고 예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리고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 감사하고 그분을 진정 사랑하기에 그들은 믿음을 선행으로 드러낼 것입니다. 이상은 일관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 가르침을 붙잡지 않으면 두 가지 최악의 극단에 빠지게 됩니다. 다름 아니라 율법폐기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 말입니다. 선하신 주께서 우리를 그 두 가지 극단에서 구하시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령이 준비하신 몸을 취하시고, 남자를 알지 못했던 여자에게서 태어나시며, 율법에 순종하고 죽음으로 인간의 죄악을 대속하시고, 영원한 의를 이루시며, 우리 안에 새로운 본성을 이루시고, 이로 인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즉, 뱀의 능력과 권세를 깨뜨리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뱀의 후손은 사탄과 그의 자녀들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의 자녀들을 유혹하고 체로 치도록 허용하십니다(눅 22:31,32).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사탄은 기껏해야 우리의 발꿈치까지만 닿을 수 있을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15절의 약속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점은 희생 제사가 도입되는 3장 후반부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어 입힌 가죽옷이 희생 제물로 죽은 들짐승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우리는 또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을 분명하게 믿고 제물을 바쳤다고 말해 줍니다(히 11:4). 하와는 가인이 태어나자 "주께서 내게 아들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헨리[Mathew Henry]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내가 사내(주), 즉 약속하신 메시아를 얻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와가 첫번째 신자였다고 생각하고 15절의 "여자의 후손"을 "이 여자의 후손"으로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첫번째 범죄자인 하와가 구속에 참여한 첫번째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돋보이게 해줍니다. 물론 아담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아담과 하와에게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장면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모습을 보여 주는 놀라운 모형입니다.

15절의 약속은 말 그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40일간 시험했을 때(마 4:1-11; 막 1:12,13; 눅 4:1-13)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대한 혹독한 핍박을 일으킴으로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호소하셨을 때(막 14:34), 기도 중에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을 때(눅 22:44)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사탄이 유다에게 예수님을 배신할 마음을 넣었을 때(요 13:27)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사탄의 하수인들이 예수님을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박아서 우리 주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을 때(마 27:45-56; 막 15:33-41)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 시험을 받으시고 여자의 후손이 되신 복되신 예수님은, 또 시험받은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으므로(히 2:18) 저주받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평화를 누립니다(사 53:5). 또한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습니다(히 2:14). 십자가에서 승리하사 정사와 권세를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골 2:15).

진실로 15절의 약속은 우리 주님이 육체로 오시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자의 후손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아야 한다(딤후 3:12)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약속에 따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서로 영원한 원수가 됩니다. 따라서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들을 핍박하게 마련입니다(갈 4:29). 이러한 적대관계는 이 약속을 계시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인이 아벨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일로 드러납니다. 이 적대관계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기 전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역사와 히브리서 11장이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후 이 적대관계는 극에 달했습니다. 사도행전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지금도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박해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박해는 세상 끝날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마십시오. 여자의 후손은 이 모든 시련을 넉넉히 이겨내고(롬 8:37)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불어나지 않습니까(출 1:12). 사도들도 그러했고 교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터툴리안(Tertullian Quintus Septimus Florens Turtullianus; 155-220, 최초의 라틴 교부로서 그 뒤 천 년 동안 서방 기독교의 어휘 및 사상 형성의 기초를 이룩했다)은 당시의 교회를 자주 깎을수록 더 빨리 자라나는 잔디밭에 비유했습니다. 실로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언제나 교회의 씨앗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의 원수들이 복음을 방해하고자 짜낸 계략을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바꾸셨는지 그 방법을 보면 놀랍고 기쁘고 경이로울 때가 많습니다. 15절 말씀에 따르면 마귀와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지만, 마귀가 박해하여 성공을 거둔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저는 때때로 마귀로서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편이 더 잘하는 걸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메리 여왕의 치하에서 순교자들을 박해하여 마귀가 얻은 이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히려 순교자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도록 영광받지 않았습니까? 옛날의 청교도들을 박해하여 사탄이 무엇을 얻었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찾아 뉴 잉글랜드(New England; 미국 북동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지역을 통틀어 이르는 말. 1620년 메이플라워 호가 도착한 곳)에 이주하여 정착한 청교도들이 세운 견실한 공동체뿐 아닙니까? 그럼 이제 우리 시대로 한번 와봅시다. 우리를 예배당에서 쫓아내어 마귀가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더 강하게 전파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 대목을 상세히 설명하는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이 주제만 나오면 하나님의 제 영혼을 벅차게 하십니다. 저는 루터처럼 "박해가 없다면 나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제 발꿈치를 더욱 상하게 하고 그 졸개들이 저를 감옥에 던져 넣는다 해도, 그 일이 오히려 사탄의 머리를 더욱 확실하게 상하게 할 뿐임을 확신합니다. 대법관이 브랫퍼드(John Bradford; 1510-1555)에게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브랫 퍼드가 자유롭게 설교할 때보다 감옥에 갇혀 한 사람씩 가르칠 때에 더 많은 해를 끼쳤다"는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정말이지 이 약속은 제게 매일 힘을 줍니다.

더 나아가 이 약속은 교회 전반에서 성취될 뿐 아니라 모든 신자 개개인에게서도 성취됩니다. 모든 신자 안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두 존재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일은 육체를 거스릅니다(갈 5:17). 은혜로 말미암아 심령이 살아난 신자가 처한 상황은 에서와 야곱을 임신했던 리브가의 처지와 같습니다. 뱃속에 든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것을 느끼고 불안해진 리브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창 25:22).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본성은(이렇게 표현해도 무방하다면) 신자의 심령이라는 자궁 속에서 서로 싸웁니다. 그러나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신 것처럼(창 25:23) 결국 은혜가 본성을 이길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분들이 자신에게 있는 부패한 본성이 너무도 강함을 발견하고, 다윗이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라고 신음했던 것처럼(삼상 27:1) 자신들도 부패한 본성 때문에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종종 느낍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이 죄와 사탄과 죽음과 지옥에 대한 신자들의 견인과 승리를 보증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거하는 죄, 다시 말해 이 뱀의 후손이 여전히 여러분에게 남아서 여러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러분의 의로운 영혼을 괴롭게 하며 심란하게 만든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부족하다 해도 두려워 말고 계속 전진하십시오. 여러분은 능히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머지않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속에 있는 죄의 존재 자체를 멸하시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심판 날만 바라봅시다. 그날에 주 예수께서 택한 자들을 티나 주름이나 그 밖에 어떤 추한 점도 없이 몸과 영혼이 모두 거룩한 모습으로 성부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엡 5:27). 그날에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마지막 결정타를 가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형제들을 무고하던 사탄과 그 모든 저주받은 후손은 쫓겨나 더 이상 여자의 후손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입니다(계 12:10). 그날이 오면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스럽고 높은 보좌에 앉을 것입니다(마 13:43).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영원한 위로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 6: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주저 하지 말고 구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갑시다.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으로 온전해지셨습니다(히 5:8,9). 여자의 후손은 분명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제발 두려워 마십시오. 사탄이 여러분의 심령을 유혹한다 해도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마귀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것들을 물리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여러분이 모든것을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주 예수께 간구하십시오. 본문의 약속을 주장하십시오. 씨름하십시오.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십시오. 이 약속은 여러분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니 설사 여기에 여러분이 받을 고난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두려워 마십시오. 결코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왕께서 그들 모두를 사슬로 매어 두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을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주께서 광야에 밀려나 있는 당신의 언약궤를 다시 들여오실 것입니다(삼상 4:2-11; 삼하 6:12-15). 그리고 사탄은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눅 10:18).

이 가운데 혹시 하나님의 원수들이 있습니까? 본문의 약속에 따라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영원히 복되신 예수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악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일 뿐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짙은 흑암만이 기다릴 것입니다(유 13절). 천국에 계신 주 예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롬 8:28).

지금 예수께서 여러분을 비웃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한없이 가소롭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을 그렇게 여길 작정입니다. 여러분이 도대체 누구라고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박해합니까? 여자의 후손이신 주 예수께서 한없이 부족한 나에게도 힘을 주사 여러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여러분, 지금까지 저는 제 힘이 아니라 구주 예수님의 힘으로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제가 믿어 온 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제가 맡은 일을 다 이룰 그날까지 저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딤후 1:12). 신실하신 그분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와 우리 심령에서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매일 체험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위대하신 성부 하나님의 온전하신 임재 앞에서,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에게 갈 때까지 말입니다(히 12:22-24).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존귀와 능력과 힘과 위엄과 권능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있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은 흔히 갖가지 핑계와 주장을 내세우며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핑계는 우리 주님의 명령이 인간의 혈과 육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말하자면 실천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그분은 '심지 않는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주인' 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품었던 악하고 게으른 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생각은 분명 오늘날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주장하는 많은 생각과도 같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미리 아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거룩한 사람들의 사례를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에서도 그리스도의 멍에를 즐겁게 메고 그분을 섬기는 일을 완전한 자유로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된 많은 성도(聖徒)들과 박해를 견딘 신앙인, 순교자들 목록을 보면 그 말이 사실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단연 빛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최초의 순교자였던 아벨이 그 선두에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에녹이 나옵니다. 시대 순에 따르기도 했지만 에녹의 출중한 영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녹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생에서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얼마나 영광스럽게 내세로 들어갔는지 짧지만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실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세에 관한 부분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실로 세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아주 특별하게 데려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산 채로 승천시키셨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히 11:5). 에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노아처럼 백성들에게 의를 전파하던(벤후 2:5) 선지자였던 것 같습니다. 유다서에는 정열적인 설교자의 면모를 보여 주는 에녹의 예언이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4,15절).

또한 그가 공인이었건 그렇지 않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그렇게 옮겨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 점에 대한 더없이 명확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구약 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산 채로 데려가신 일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이미 수백 년 전에 조상 가운데 선지자가 두 명이나 승천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기 때문에, 사도들이 주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 증거가 유대인들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녹 개인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이 정도로 해 두고, 저는 이제 주님께 힘입어 대단히 중요한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해 말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죽은 뒤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헛되게 살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저는 맨 먼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려 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유지하고 지켜 나갈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세번째로, 지금까지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해 오지 않았다면, 지금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과 동행하도록 여러분을 일깨울 동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두 가지 적용을 덧붙이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맨 먼저, '하나님과 동행한다'라는 표현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바꿔 말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증오의 지배력을 성령께서 제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육신의 마음, 회개하지 않은 자연인의 마음, 그리고 중생한 자라 해도 그 마음에서 새롭게 변화하지 않은 부분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수준을 넘어 그분을 향한 증오 그 자체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매일 하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롬 8:7). 어떤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활동과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향한 증오에 그토록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아, 어쩌겠습니까, 사실인 것을!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 그에게 물든 증오가 그의 후손 모두에게 대를 이어 감염되고 퍼졌습니다. 이 증오는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에덴동산의 숲에 숨으려 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마음을 열고 "제가 여기 있나이다"하며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슬프도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막 갖게 된 증오를 드러내며 지존하신 하나님께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혹은 이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뿐입니다"([ ]는 저자 표기).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사실상 모든 잘못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마치 "당신이 제게 이 여자를 주지 않았다면 당신을 대항해 죄를 짓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제가 죄를 짓게 된 것은 모두 당신 탓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일한 증오가 아담의 후손들 마음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하나님께 대항해 뭔가가 치밀어 오름을 느낍니다. 심지어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오언(John Owen; 1616-1683, 청교도 신학자이자 정치가) 박사님은 심령에 거하는 죄를 다룬 탁월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진정한 경쟁 상대로 여긴다."

또한 그 증오가 내리는 명령은 아합 왕에 대한 앗수르인들의 명령과 흡사합니다. 그들은 오직 아합 왕만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왕상 22:31; 대하 18:30). 그리고 그 증오는 진정한 영성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합니다. 마치 앗수르인들이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 왕을 공격하려 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이 아님을 알고 공격을 멈추고 돌이켰던 것처럼, 공격의 대상이 진정한 영성이 아닌 껍데기에 불과함을 알게 되면 증오심을 거두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증오는 저주받은 가인에게서도 드러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미워했고 급기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벨이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방법으로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 안에는 이와 동일한 증오가 존재하며 활개치고 제 뜻대로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뿐 아니라 신앙교육을 받은 성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기도나 거룩한 의무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홍수처럼 세상에 넘쳐흐르는 그 모든 공공연한 죄와 사악함은 이 무시무시하고 전염성이 강한 원천에서 흘러 나오는 여러 물줄기일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사악하고 기만적인 증오 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구원을 이루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증오심부터 없애야 함을 인정할 것입니다. 절대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증오와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함께 살거나 친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이토록 이 증오의 지배력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 주목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뒤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한탄합니다. 실제로 그 악이 그를 지배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선한 의도와 행동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바람에 그는 자신이 하기 원하는 일을 새 사람의 본성이 원하는 만큼 완전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악을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프로네마 사르코스로서, 이것으로(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앙고백 제 9조의 표현을 빌려) 중생한 사람들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육체의 지혜와 육욕, 가식이나 갈망을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난 모든 영혼 안에서 죄의 지배력은 파괴되었고, 신자가 은혜 안에서 자라 가고 성령께서 그 마음에서 점점 더 주도권을 확보하심에 따라 더욱 약화됩니다.

둘째,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에서 증오의 지배력이 제거됨을 뜻할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온전한 의와 대속을 통해 한 사람이 실제로 성부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주석 6 : 실제 본문은 아모스 3장 3절이다)은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며 또 우리를 화평케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까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과 친구 사이거나 한때 사이가 안 좋았다 해도 이제는 화해하고 다시 친구가 되었다는 표시이자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화해의 중재가 복음전도자들이 감당해야 할 막중한 사명이며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믿지 않는 분들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여러분이 이 은혜로운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과 화해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과 안정되고 변치않는 동거를 하고 사귄다는, 즉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는 뜻이 포함됩니다.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너희 안에,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약속하셨던 사실입니다. 정말 성령께서는 투숙객처럼 하룻밤만 머물고 가는 대신 제자들의 마음을 거처로 삼고 거주하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대로 행할지니라"(요일 2:6)는 말씀을 통해 전하려고 했던 바가 바로 이 성령의 내주하심이라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본문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즉 에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과 거룩하고 안정되고 몸에 밴 동거와 사귐을 유지했습니다. 물론 그 교제가 전혀 단절이 없이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의지를 하나님 쪽으로 기울이는 확고한 습관,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의지하는 습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습관,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습관들로 이루어집니다.

넷째, 하나님과 동행한다(Walking with God)는 말에는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진보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걷기(Walking)라는 단어가 가진 첫번째 의미라면 앞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걸어가는 사람은 아무리 천천히 움직인다 해도 전진하지 한 장소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편 기자가 노래하듯이 "힘을 얻고 더 얻어"(시 84:7) 계속 나아갑니다. 그 걸음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갑니다. 이것은 주의 영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후 3:17).

또한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는 더하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면 어디로 보나 그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가 므두셀라처럼 천 년을 산다 해도(창 5:27) 그는 결국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새 생명에는 쇠퇴하거나 발전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은 타락하여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도 아기, 청년, 아비와 같은 생명의 성장단계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반전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라"(딤전 4:15)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사사로이 디모데에게 요구했던 바를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명합니다.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새로운 피조물은 영적으로 자라 갑니다. 그러나 그 자라는 정도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사후(死後)에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과 믿음이 낙오한 자들(딤후 3:8)뿐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들 가운데도 감정이 앞서는 일부가 자신도 모르게 율법폐기론에 빠져 듭니다. 그래서 신자가 은혜로 자라 간다는 사실과 은혜 받은 자에게는 그 은혜에 합당한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면 부인합니다. 만주의 주께서 율법폐기론과 그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기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으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증오가 성령의 능력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안정된 동거와 사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매일 진보하여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신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지, 이제 두번째 단락으로 넘어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신자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과 계속 동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연구하라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주의 말씀은 그의 발에 등이요 그의 길에 빛"(시 119:105)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성경 읽기를 복 있는 사람의 한 가지 특성으로 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 읽기에 전념하라"(딤전 4:13)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수 1:8)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성경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롬 15:4).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여 온갖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딤후 3:16,17).

따라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믿음과 삶의 유일한 잣대로 삼기를 거절하고 우리 자신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곧 온갖 기만에 노출될 터이고 양심을 저버리고 믿음이 파선할 위기에 놓일 것입니다(딤후 1:19).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도 언제나 '기록된 말씀'에 따르셨고 그것으로 마귀와 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부릅니다(엡 6:17). 우리도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보고 말했던 것처럼(삼상 21:9) 성경에 대해 "그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도 불립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낳는 데 뿐 아니라 영혼 안에서 새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에도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편지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변형되신 모습을 본 일보다 성경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8절에서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말한 다음,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우리의 육신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는 저자 표기)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벗고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그때까지 말씀의 유리창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언자로 삼고 마리아처럼 매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눅 10:39). 그리하면 그 말씀이 우리 영혼에 활기와 생명력을 공급하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임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둘째, 신자들은 은밀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 관계를 유지하고 지켜 나갑니다. 이렇듯 은혜의 영에는 언제나 간구의 영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기도는 새로운 피조물의 호흡이자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을 부치는 부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혼에 붙여 주신 불씨를 보존할 뿐 아니라 활활 타오르게 합니다.

실제로 은밀한 기도를 소홀히 할 때 많은 영적 질병들이 들어와 치명적인 결과들을 낳았지 않습니까. 오리겐(Oregenes Adamantius; 185-254, 초기 그리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이자 성서학자)은 "그가 우상에게 분향한 날, 그는 골방을 나와 은밀한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신자의 영적인 갑옷 가운데 가장 고결한 부분입니다. "모든 간구로 언제나 기도하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엡 6:18). 우리 주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막 14:38). 또한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이르십니다(눅 18:1).

그렇다고 주님께서 다른 의무들을 소홀히 여기면서까지 우리가 골방에 들어앉아 기도하기만 바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은 우리 영혼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을 유지하여 스코틀랜드의 한 성도가 임종시에 친구들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커튼과 이 벽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들이 자네들에게 내가 이곳에서 하나님과 얼마나 달콤한 교제를 나누었는지 말해줄 걸세." 오, 기도! 기도!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 줍니다. 기도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께 올라가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내려오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여,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한다면 기도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은밀한 기도, 규칙적인 기도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틈나는 대로 기도하여 믿음의 날개에다 천국으로 보내는 짤막한 편지들을 실어 보내십시오. 우리가 드리는 기도 편지들이 하나님의 심장에 도달하여 영적인 축복을 가득 싣고 여러분에게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셋째, 틈나는 대로 거룩한 묵상을 하십시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과 계속 동행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루터는 "기도, 성경 읽기, 유혹과 묵상이 목사를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온전하게 합니다. 몸이 소화를 거쳐 영양분을 얻듯이 영혼은 묵상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다윗왕은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자주, 때로는 밤에도 묵상에 잠겼습니다. 이삭은 묵상하기 위해 저녁에 들로 나갔습니다(창 24:63). 다시 말해 기도하러 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도 일종의 침묵기도니 말입니다.

침묵기도로 우리 영혼은 자아를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직관력으로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 천사들(마 18:10)과 조금은 비슷해집니다. 이 거룩한 일에 익숙해진 행복한 영혼들만이 묵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묵상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고양시키는 참으로 복된 방법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윗은 "묵상할 때에 불이 붙었다"고 말합니다(시 39:3). 믿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하신 일들을 묵상할 때, 특히 가장 위대한 역사(役事)요 경이 가운데 경이요 경건의 비밀인,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딤전 3:16), 세상 죄를 대신해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 묵상할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어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지존하신 하나님과 친밀하고 한결같이 동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주 묵상하십시오.

넷째, 신자들은 자신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주시하고 주목하면서 하나님과 계속 동행합니다. 우리가 진정 성경을 믿는다면 성경 안에 있는, 주님이 하신 다음과 같은 선언도 믿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바 되었느니라.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곡식을 쪼아 먹기 위해서건 사냥꾼에게 맞아서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모든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주시는 모든 일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 안에서 이룰 특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들아, 우상을 멀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순조로운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작고 상냥한 목소리로 "아들아, 내게 네 마음을 주려무나"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한다면 신자들은 주님께서 섭리라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인 이삭의 배필을 데려오기 위해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섭리를 구하고 살펴서 주인의 천생연분을 찾아냈습니다(창 24:14-27). 또한 홀(Joseph Hall; 1574-1656)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서 오는 약간의 암시만으로도 믿음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저는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행복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천국까지 이끈 황금사슬이 여러 고리들을 살펴보고 회고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천국을 가장 크게 누릴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루시면서 그분의 섭리에 따라 허락하신 일들을 세밀한 데까지 깨닫는 사람일 것입니다.

다섯째,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밖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살펴야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서 움직이시는 성령의 활동도 살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4).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린아이가 손을 내밀어 보모나 부모 손을 잡고 따라가듯이 자신을 드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우리가 회심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외면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척하는 행태는 광신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되 어디까지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받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에 계신 성령의 활동에 주목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정확한 잣대로 삼아 여러분이 받은 암시나 느낌을 항상 시험하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말씀에 맞지 않으면 사탄에게서 나온 기만적인 것으로 여겨 물리치십시오. 이 주의사항을 지키면 여러분은 이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빠질 우려가 있는 위험한 양극단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광신이 한 극단이라면 나머지 극단은 이신론과 노골적인 불신앙입니다.

여섯째, 하나님과 거룩한 동행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은 섭리에 따를 뿐 아니라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눅 1:6)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갖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규례를 빈약한 요소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내려 주시는 많은 파이프로 여깁니다. 또한 그들은 규례를 최상의 특권으로 여깁니다.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오라, 우리가 주의 전에 오르자"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즐겨 찾을 것이며, 주께서 오실 때까지 기회가 생기는 대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음을 기꺼이 전할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과 사귀고 교제해야 합니다. 다윗은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보기에 그들은 땅에 있는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옛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교제를 계속하면서 활력과 첫사랑을 유지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모이기를 절대로 그만두지 말라고 권합니다(히 10:25). 혼자라면 어쩌 따뜻하겠습니까?(전 4:11)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인 솔로몬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잠 27:17) 교회사를 연구해 보거나 아니면 그저 우리 시대를 살펴보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력을 얻을 때면 기독교 단체나 모임들도 덩달아 강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쇠하면 동시에 모임들도 쇠하여 미미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함께 모여 사랑과 선행을 베풀면서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히 10:24).

이제 우리는 세번째 대목에 왔습니다. 이 대목에 힘입어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로 나아오기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은 참으로 명예로운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명예야말로 계층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어떤 중요한 일을 시작하게 만드는 주된 동기입니다. 그 명예가 지금 합당한 무게로 다가와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땅의 군주(君主)의 자문회의에 들어가 군주의 비밀을 듣거나 언제든 그에게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일을 큰 명예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만 역시 그런 생각으로 에스더 5장 11절에서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자랑하였습니다.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에 6:6) 하는 왕의 질문에 하만은 8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야심만만한 하만이 당대 최고의 제왕이었던 아하수에로 왕에게 요청할 수 있는 가장 값진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요구사항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예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극히 작은 자가 누리는 명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만유의 주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는 특권을 사소하게 여기십니까?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명예가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분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얼마나 큰 명예인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마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둘째,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은 명예로울 뿐 아니라 즐거운 일입니다.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은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모든 길에는 평안이 있다”(잠 3:17)고 말했습니다. 저는 헨리(Henry)주교가 친구에게 유언으로 남겼다는 이 말을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언을 남긴다지? 그럼 이것이 내 유언이라네.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낸 삶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삶이다.’”저 역시 그 말이 사실임을 보증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휘하에 들어온 지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죄악을 마다 않고 인생을 즐기며 수천 년을 사는 것에 비할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 한순간에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제 말이 사실이라고 증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궁전에서 보낸 하루가 다른 곳에서 보낸 천 날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을 때, 정말이지 푸짐한 상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게 느껴지지 않습니까?(시 19:10,11) 여러분이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했을 때 무엇을 느꼈습니까? 여러분이 들에서 묵상할 때 예수께서 자주 여러분을 만나 주셨고, 성찬의 떡을 뗄 때 거듭해서 여러분에게 자신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환히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말할 수 없는 기쁨,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 모든 질문들에 그렇다고 답하리라고,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고 기꺼이 인정하리라고 믿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특별기도 문구를 빌려 표현하자면 바로 이렇습니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 완전한 자유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과 동행하게끔 격려할 다른 무슨 동기가 더 필요합니까? 하지만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그토록 명예롭고 즐거운 일이라면, 어째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악하다고 배척받고 어디서나 갖은 비난을 받는 거야? 그들이 자주 고통받고 시험받으며 가난하게 살고 고문당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지? 이런 것이 당신이 말하는 명예와 즐거움인가?”사실 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지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시면(요 7:24)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모두 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나 박해자였던 바울이 했던 말처럼 ‘이 도(道)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악하다고 배척받고 온갖 곳에서 비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취급을 합니까? 그들은 바로 지존하신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비난받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마 5:11).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아픔들은 그들에게는 제자로서 누리는 특권이며, 이 일로 천국에서 그들의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께서 친히 이런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을 따르는 일만큼 피조물에게 더 큰 명예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자주 고통받고 시험받고 가난하게 살며 고문당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일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누리는 즐거움을 파괴합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힘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롬 5:3)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도 기뻐할 힘을 얻습니다(약 1:2).

하나님과 진실하고 친밀하게 동행했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겪어 왔던 많은 경험들을 돌아볼 때, 그들이 고통받았던 때가 가장 귀한 시간이 아니었느냐고, 사람들에게 가장 배척받고 조롱받았던 때가 바로 하나님 때문에 가장 큰 기쁨을 누렸던 때가 아니었느냐고.

실제로 유대 산헤드린이 위협을 가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더 이상 증거하지 말라는 명령을 했을 때 사도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행 5:41). 바울과 실라는 깊은 감방에 갇혀서도 찬양했습니다(행 16:24,25). 기독교 최초로 영광스럽게 순교한 스데반의 얼굴도 천사처럼 빛났습니다(행 6:15).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예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고난과 고통을 누그러뜨리시기에, 그분의 제자들은 고난이 많을 때에 위로가 더욱 넘친다(고후 1:5)는 사실을 체험하는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앞서 했던 반론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고자 제가 제시했던 명예와 즐거움이라는 동기들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강화시킬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들이 정당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그 주장대로 수치스럽고 불행하게 살아간다고 칩시다. 그래도 저는 셋째 동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지성소의 저울에 달면 모든 반론을 압도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동행길의 끝에는 천국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버리지(Beveridge) 주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그 길은 좁지만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 문은 좁지만 영생에 이릅니다.”

에녹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나라에 영원히 곁에 두시려고 데려가셨습니다. 그렇다고 에녹처럼 데려가시기를 기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중팔구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한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의 영은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함께 주님 곁에 있을 것입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처럼 변화될 테고 영혼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실로 그들은 보좌에 앉을 것이며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엄청난 무게로 영원토록 밀려드는 영광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영광은 바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누리셨던 그 영광입니다.

경건하고 박식했던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독일 루터교 목사요 성만찬 논쟁에 참가한 주요 인물)목사는 숨을 거두기 전에 “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영광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왓츠(Issac Watts; 1674-1748, 찬송가 작사자로 찬송가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등을 작사) 박사의 말대로 그 영광을 생각만 해도 “우리의 칠십 평생을 건너뛰고 싶어지고”, 다윗 왕처럼 진실로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꼬”(시 42:2)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보통 때보다 훨씬 강하게 비치고 밀려들 때 이 영광을 깨닫고 기절하거나 얼마 동안 감각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솔로몬의 영광을 보고도 시바 여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못한 광경인, 요셉이 보낸 수레들만 보고도 야곱은 어안이 벙벙해 사실상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 부분의 정확한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창 45:25-27, 개역개정판) 다니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멀리서 보고 천사의 발치에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멀리서 본 광경이 그토록 놀랍다면, 그 영광을 정말 소유하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첫 열매가 그토록 영광스럽다면 그 수확물은 또 얼마나 무한히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제가 무슨 말씀을 더 드려야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자극을 받고 나아와 그리스도와 동행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진정 명예와 즐거움과 영광의 면류관을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곳에서 찾으십시오. 오셔서 주 예수를 덧입으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서둘러 떠나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더 이상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 13:14). 이제 제발 멈추십시오. 죄인들이여! 여러분, 돌이키십시오. 여러분, 돌이키십시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여, 눈먼 여러분의 눈에는 아무리 바른길로 보여도 여러분이 걷고 있는 그 길의 끝은 죽음입니다. 몸과 영혼이 영원히 파괴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는 길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마십시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죽음이 여러분을 붙잡고, 심판이 여러분을 기다리며, 여러분과 끝없는 영광 사이에는 대협곡이 영원히 가로놓여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꺼려하시는 분들은 제발 이 모든 일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명심 또 명심하십시오.

이제 대장부답게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렇게 외치십시오.

“육신의 정욕이여, 안녕. 다시는 너와 동행하지 않을 것이다! 안목의 정욕이여, 이생의 자랑이여, 안녕히! 육신에 속한 친지들과 십자가의 원수들이여, 안녕. 나는 너희와 더 이상 친밀하게 동행하지 않을 것이다. 환영합니다. 예수님, 환영합니다. 당신의 말씀이여, 환영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이여, 환영합니다. 예수의 영(靈)이여, 환영합니다. 예수의 백성들이여, 저는 이제 여러분들과 동행하려 합니다.”

오!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이 잊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분명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인정하시고 한량없는 천국의 봉인으로 보증하실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출생 이후 줄곧 여러분이 너무도 사악한 마음을 품고 여러분의 뜻대로 욕망을 좇아 살아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와 함께 거하리라”(사 57:15, 66:5)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 보혈이 여러분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 따라 불신자들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굳이 여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명예로울 뿐 아니라 즐겁고 너무나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다시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체험하여 알고 계시며, 날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기억을 상기시켜 드리는 차원에서, 여러분의 깨끗한 마음을 격려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당부드립니다.

부디 조심하시고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십시오.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할수록 생명이신 하나님을 더욱더 누릴 수 있으며 영원한 기쁨이 있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기에 합당한 모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지 마십시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거룩한 의식에 참석하지 마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수치스러운 일은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결코 인색하거나 무관심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울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고 그 사랑에 힘입어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 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결코 그분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여기 이 자리에 계신 목회자 분들께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보십시오. 형제들이여, 제 마음이 지금 너무도 벅찹니다. 제 마음에 있는 말들을 꺼내 놓자니 그 부피가 너무 크고, 그렇다고 묻어 두자니 가슴이 터질 듯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리스도의 사절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고전 4:1)에게 특별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에녹이 아마 정열적인 설교자였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비록 죽었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광스럽고 복되신 주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라는 말로 우리의 열정을 자극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에녹이 어떻게 말씀을 전했습니까! 사악하고 음란한 시대에 살면서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했습니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에녹을 따라갑시다. 머지 않아 그가 있는 곳에 우리도 가게 됩니다. 그는 지금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우리도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도 그보다 훨씬 빠른 시일 내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지상에서 300년을 머물렀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사람의 수명이 짧아졌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우리의 인생은 끝이 날 것입니다. 심판자가 문 앞에 계십니다. 오실 그분이 오실 것이며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히 10:37). 상급이 그분에게 있습니다(사 62:11). 만유의 주께 열심을 다한다면 우리는 모두 머지 않아 성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성부와 복되신 성자와 영원하신 성령께 존귀와 영광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아멘.

 

□ 선한 목자(주석 7 : 이 설교는 휘트필드가 1769년 8월 30일 수요일,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설교이다. 이 설교를 한 뒤에 미국으로 건너간 휘트필드는 미국에서 사역을 계속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별 설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무례함이 훌륭한 예법을 낳는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말이 되는 격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격언을 세상 만사에다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분명 아주 정확한 통찰력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무례함과 푸대접, 악담들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인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 생애 최고의 설교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시고 하나님의 신임장을 받아오신데다 어느 누구보다도 권위 있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당시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 앞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성령의 나타나심에 놀라며 한목소리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세워 주실 모세 같은 선지자”(신18:15)이심을 인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면 사람들은 말씀하시는 내용이건 다른 무엇이건 어떻게든 늘 트집을 잡았습니다. 사람들은 품위 있는 언행 뒤에 숨겨진 예수님에 대한 적의를 계속해서 드러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그들은 번번이 끼어 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님이 죽음을 허락하시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10장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기껏해야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거나 미쳤다는 식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다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들렸소. 어찌하여 그런 미친 사람의 말을 듣는 거요? ”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 우리 종들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 가운데 그래도 좀 침착하다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소?”

실제로 귀신은 결코 이런 식으로 설교하거나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군중 가운데 “귀신이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단 말이오?” 하며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낙심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역을 계속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인정을 받건 악담을 듣건 기꺼이 하나님의 일을 계속합시다.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 나가면서 우리는 마귀가 한 번 짖기만 해도 얼어 버리는 그런 무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귀에게 확실히 깨닫게 해 줍시다.

우리 주님은 수전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계셨고,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수전절은 안티오쿠스가 더럽힌 성전과 제단을 다시 봉헌한 기념으로 이스라엘에서 매년 7,8일간 지켜 온 절기였는데,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제정한 절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일에 일일이 간섭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중요한 일들도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하면 설교 시간에 의식과 예법에 대한 논쟁들을 잔뜩 늘어놓는 대신에 복음의 진수들을 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그때에는 의식과 예법이 훨씬 사소해 보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이유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기를 기회로 복음의 그물을 펼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감리교가 생긴 지 40년이 되도록 우리 설교자들이 신앙의 비본질적인 내용에 관해 쓴 책이 한권도 없다는 사실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수전절에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무실에 모셔 놓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설교를 요청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을 거니시도록 그대로 두었습니다. 모두들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꺼렸기 때문에 혼자 거니셨으리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때 예수님이 성전 안을 거니시면 이제 곧 파괴될 성전의 모습을 애견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모르긴 해도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 임할 무시무시한 재난을 미리 보시면서 다가올 재난의 때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시름에 잠기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전을 거니심으로써 당신께서 사람들이 두려워 피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성전을 거니시는 것은 마치 “너희 가운데 내게 할 말이 있는 자가 있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들의 문제를 기꺼이 해결해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무례하게 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대인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들은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는 에워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잡았다. 그를 공격하자.”

그리고 시편에 예언된 다음 구절이 성취됩니다.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시118:12)

마치 침으로 쏘려는 말벌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제 그를 에워싸고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한번 보자. 그를 이길 수 있는지 한번 보자.”그리고는 예수께 가서 말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어찌 보면 이 질문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게 하려나이까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이 구절을 다음처럼 해석하는 주석가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이런 식으로 훔치려는 겁니까?”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압살롬처럼 딴 속셈을 가지고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메시아 행세를 하는 사람쯤으로 보려고 했습니다(삼하15:6). 실제로 육적인 마음은 언제나 다른 선한 사람들의 행동을 이런 식으로 곡해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심했다는 사실입니다. 의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의심하는 것이 하나님의 탓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오직 그들 자신 탓임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 하나이까? 선생님, 좀더 쉽게 말해 주시고 비유는 이제 그만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제발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 주십시오. 당신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그들은 아주 거룩한 척하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주장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하면 된다. 반대로 만약 그가 자신이 그리스도라 말한다면, 그때는 그를 총독에게 고발하면 될 것이다. 총독에게 가서 이 자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한다고 말해야 겠다. 메시아는 없으니 이 자는 시전에게 반역하는 자라고 고발하면 그만 아닌가.’ 이처럼 마귀는 국가에 충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취급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장기입니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주시오.”우리 주님의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원래 진실한 사람은 대답을 미루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이때 우리 주님이 스스로 메시아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아마 주님을 체포했을 것입니다.

이 점을 미리 아신 주님은 “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동시에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한 일들과 가르침을 보라. 너희가 그것들로부터 내가 메시아임을 유추할 수 없다면 내가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구나.” 그리고는 “그러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덧붙이십니다. 그들의 불신앙이 그리스도에게는 너무도 큰 아픔이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두 번이나 한탄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또 이런 뜻일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든지 나를 곤란하게 하려고만 늘 궁리한다. 이런 행동으로 나를 실망시키려고 머리를 쓰지만 너희가 생각을 잘못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이유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뉴잉글랜드(세상에서 이곳만큼 위대한 신학자들을 여럿 배출한 곳이없습니다)의 스타더드(Solomon Stoddard) 목사님은 "그러나 너희가낸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를 본문_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설교 본문으로 삼아 회중을 회실 시키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그 설교를 통해 200에서 300명에 달하는 영혼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럽게 그분을 전하느라 노고를 아끼지 않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그러한 성공을 허락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성경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은 아주 놀랍습니다. 성경에는 침례교인나 독립교인 영국 성공회에서 분리해 나와 독립지역교회를 형성하고자 했던 영국의 청교도들, 나중에 회중교회파라불림), 감리교인이나 장로교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전 인류를 두 계급, 즉 양과 염소로 나누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바로 오늘 아침 우리가 어느쪽에 속했는지 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항상 뭔가 선하고 유익한 사물에 비유하고 불신자들은 항상 뭔가 나쁘거나 쓸모없는 사물에 비유하신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왜 양으로 불리느냐고 묻는다면 주님의 도우심으로 간략하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될 수 있는 한 여러분이 충분히 만족할 만한 답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은 일반적으로 모여 있기를 좋아합니다. 양떼라고 말할 때가 많지, 양 한 마리만 따로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양은 자그마한 동물입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양이라 불릴 만합니다. 세상의 눈에도 작을 뿐더러 그들 자신이 보기에는 더 작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 위대한 사람들이 우리 편에 있다면, 왕과 영주와 국회의원이 우리 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상의 모든 왕들이 우리 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경우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과연, 교회가 더 잘되어 갈 것 같습니까? 궁정에서 감리교도가 되는 일이 유행이라면, 해외에서 감리교도가 되는 일이 유행이라면 사람들은 소설 대신에 성경이나 찬송가를 끼고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햇빛이 너무 밝은 곳에서는 신앙이 번창하지 못합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6,27).

왓츠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 여기저기에는 왕도 보이고 위인도 보이지만 그들은 소수일 뿐이라오." 또한 양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순수하고 온화한 동물입니다.

오, 하나님, 그 한없는 은혜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순수하고 온화한 성품을 부어 주셔서 우리가 당신의 양임을 알게 하소서.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입니까? 기적을 행하는 법입니까? 아닙니다.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어떤 훌륭한 분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른 어떤 성품보다도 더 구해야 할 성품을 하나 꼽는다면 수모를 견디되 평안을 잊지 않으며 그 받은 수모를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온유함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또한 받은 상처가 아프더라도 악에게 지지 말고, 주신 은혜에 힘입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2:21). 그리고 모세는 세상 어떤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민 12:3). 특히 권력 있는 사람은 온유해야 합니다. 성미가 급한 사람은 위험합니다. 모든 통치자에게는 열정이 있어야겠지만 무자비하고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말 통치자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파이톤이 태양수레를 모는 꼴과 같습니다. 둘 다 세상을 불태울뿐입니다.

게다가 양은 세상의 모든 짐승 가운데 가장 곁길로 빠져 길을 잃기 쉬운 동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점에서도 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침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과 같이 실수했으며, 당신의 길에서 벗어났나이다.” 실제로 말이나 개를 밖에다 버리면 그놈들은 집을 곧잘 찾아옵니다. 그러나 양은 헤매고 다닐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를 내고 다닙니다. 꼭 이렇게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입니다. '낮선 분께 죄송하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을 좀 가르쳐 주세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양도 여차하면 양떼를 벗어나 방황하기십상입니다. 위대한 목자이신 예수께 눈을 떼고 나면 이 들판 저 들판을 방황하거나 이 울타리 저 울타리를 기웃거립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는 간혹 양털을 다 뺏긴 채 집에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양은 가장 유용한 동물이기도 합니다. 양들은 땅을 갈아 씨를 뿌릴 준비를 해 줍니다. 양털을 제공해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양의 어떤 부분도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오,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여러분과제가 이 점에서 양과 같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유로 우리가 선행을 소홀히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것이 보통 '의의 전가'교리를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유는 비방, 그것도 파렴치한 비방일 뿐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선행을 대단히 강조했지만, 정작 선행을 보려면 칼빈주의자들에게 가야 한다는 종교개혁 시대의 격언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의 양들은 어떻게 하면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을 입힐 수 있을까 연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보고 '나의 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모두 함께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나의"-짧지만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놀라운 단어입니까. 우리는 그분에게 영원히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당신이 제게 주신 양들'이라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부와 성자가 영원 전부터 맺은 언약 아래에서 성부 하나님이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력이 부족한 탓일 뿐 그래도 인정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우리는 그들이 이 교리를 깨닫는 지혜를 받아 우리를 이해하도록 주님이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다름 아닌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내 양'이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그들을 사셨습니다. 오,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오늘 아침 가엾은 휘트필드가 드리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들으러 왔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교하는 이 사람은 잊으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장막 너머로 안내하고자 할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인도하기 원하는 목적지는 갈보리 산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소유라고 부르시는 사람들을 사기 위해 흘리신 보혈의 희생을 보기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들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들을 영원 전부터 선택하신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목숨 바쳐 그들을 속량하심으로 그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성부께서 그들을 성자에게 주셨지만,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그들을 구속하신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여러분과 저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성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고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부르시는 날에 하나님께 즐겁게 헌신할 힘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에 대해 특별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한 목자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8절과 시편 78편 71절 등 성경의 몇 군데에서는 목자가 양떼를 따라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영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양을 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보통목자들이 앞서 갑니다 지팡이를 잡고 앞서 나가는 목자들의 목소리를 양들은 알아듣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역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1; 막 9:7; 눅 9:35)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은 모세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율법의 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우리는 시내 산을 통하지 않고는 시온 산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이 바른 길입니다. 어쩌다 자기가 회심한 때를 모른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극소수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자신이 회심한 때를 압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의 부르심을 먼저 받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 그들은 율법의 소리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 율법의 소리를 먼저 들은 다음에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에 이르도록 불러 주실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는 외투를 오히려 단단히 붙들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우리의 부패함을 오히려 더욱 부채질합니다(롬 7:7,8:9).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그들의 영혼에 비취면 그들은 자신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자신들의 부패함을 벗어 버리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들아, 딸아, 안심하라. 너희가 지은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는다.'는 말씀은 그들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쏠려 있는지 나타내 줍니다. 악한 자들은 마귀의 목소리를 듣고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고 재산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양들 역시 그런 것들에 관심을 쏟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들은 구속하신 주님의 피가 전하는 평안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은 진정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면 그리스도를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분의 음성을 들은 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또한 영광을 얻은 성도들을 가리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라고 했습니다. 목자가 지팡이 방향을 어디로 돌리든지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양들은 때로는 서로 밟거나 다치게도 합니다. 그들은 정말 서둘러 천국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일생 동안 그분을 따른다는 뜻이며, 그분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한다는 뜻이며, 그분을 따라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요청했습니다(마 14:28). 만약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위해 대양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리신다면 하나님, 당신의 한없는 자비하심으로 우리와 동행하여 주소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큰 목자이신 예수님이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의 특징은 생각에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애쓴다는 데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설교를 계속 이어 나가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서 다시 만난다 해도 이 설교가 저에게는, 적어도 몇 달 동안은 마지막 기회이기에 이 말씀을 꼭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보통 때 같으면 오늘 아침처럼 일찍 일어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세상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양떼에 속한 자인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남녀를 불문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르며 자신을 주저 없이 그분께 내어 드린 적이 있습니까? 저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믿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하는 지금 제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지금 제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이 위대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들이요 구원받은 소중한 영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떠나 방황하는지, 예수님에게 가져다 드리는 열매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양이 목자를 따르듯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께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당신 뜻대로 우리를 선택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 은혜와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같이 불쌍하고 비참한 죄인, 변변찮으나 행복한 순례자의 사역을 통해 당신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들려주기를 기뻐하셨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면 그분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내 양을 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나는 그들을 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아십니다. 만약 그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빠진 사람이 있다면 성부 하나님은 그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요 18:9). 분명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양을 아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 보면 그분은 그들의 숫자를 파악할 뿐 아니라 그들 개개인에 대해 세세히 파악하시며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단한 마리밖에 없는 양인 것처럼 그들 각자를 극진히 돌보십니다. 그런 그분이 위선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픈지, 어떠한 시험과 유혹을 당하고 있는지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리는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그들이 어떤 시험을 당하고 있는지 아십니다. 그들의 중생한 심령을 괴롭히는 타락한 본성을 아십니다. 그들이 헤매고 방황할 때마다 그 사정을 헤아리시고 조심스럽게 그들을 제자리에 끌어다 놓으십니다. 언젠가 저는 시장판에서 들을 수 있는 걸쭉한 언어로 주님을 전했던 매리엇(Maryat) 박사가 피너스 홀에서 (이 강단이 언제나 그와 같은 설교자들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을 데려오는 데 쓰기 위해 큰 개 한 마리를 기르신다.'고 말하는 것들은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양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면 목자는 으레 개를 보내어 양들을 추적해서 도로 데려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양들이 방황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마귀가 그들을 추적하고 그들을 향해 짖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들을 더 멀리 쫓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데려오는 수단으로 마귀를 활용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꼭 상기시켜드리고 싶은 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모든 시험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로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알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걸핏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잊으신 건 아닌지 의심합니다(시 77: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는 서로를 비방하고 서로에게 사악하게 굽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무고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판단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붙잡을 것이라고는 '주님께서 내 정직함을 아신다. 주님께서 내 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여기 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여기 여러분에게 복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오, 이 말씀이 3i년 전에 제 마음에 왔을 때만큼 뜨겁고 강하게 여러분의 심령에 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제 삶 속에서 발견되는 부패함 들을 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보다 더 강하게, 너무 젊은 나이에 성직에 들어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들은 제가 그렇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벤슨 주교님은 제게 특별한 호의를 베푸셔서 부제 안수뿐 아니라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주시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빨리 교회를 맡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제가 그토록 어린 나이였는데도 설교를 하기 위해 단에 서라고 성화였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성직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모습이 제 친구들에게는 그리 거북해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달랐습니다. 목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과 설교를 한다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염려가 되었는지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저는 천 번도 넘게 땀이 비 오듯 쏟아질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한량없이 자비하신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사실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제가 성직에 들어서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글로스터 에 (그 방이 기억납니다. 지금도 글로스터 에 가면 저는 그 창문을 올려다보고 그 거리를 걸어 봅니다. 그 창문, 그 침대 , 제가 기진맥진하여 맥진하여 쓰러져 있던 그 바닥이 떠오릅니다) 있을 때 이렇게 기도 한적이 있습니다.

“주님,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자만에 빠질 것이고 마구의 올무에 빠지고 말것입이다. 주님, 저를 아직은 보내지 마소서.“ 저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2,3년 더 머무르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저는 대학에 머물면서 설교를 150편 준비할 계획이었고 목회의 길로 들어설 채비를 단단히 갖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승강이를 벌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망했습니다. 저는 당산의 놀라운 이름으로 설교하기에 적합한 자가 아닙니다. 저를 보내지 마소서. 주님, 제발 저를 보내지 마소서.” 저는 옥스퍼드 시내와 영국에 있던 친구들에게 벤슨 주교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제가 스물두 살이 되기 전에 성직에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제게 하는 그 모든 제안을 들은 후에 바로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양은 내 음성을 듣느니라.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오, 귀한 형제들이여, 이 말씀이 제 심령에 뜨겁게 임해 축복이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주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이 제 심령에 다가오자 드디어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가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실 때에 저를 보내소서.” 한번은 미국 조지아 주 근처의 도버 아일랜드라는 곳에서 폭풍우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150명이나 되는 가족이 나만 바라보고 있건만,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에서 그들을 부양할 돈 한 푼 없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목사님과 했던 대화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목사님,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는 말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오, 그 말씀에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는 들려주시지 않는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불쌍한 양들이 ‘내가 천국에 이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의심을 품을 거란 걸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선언이 있습니다. 세 가지 약속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제일 먼저, “나는 그들을 안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멸망치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욕심과 부패함으로 인해 언젠가 무너져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만적인 마음에 넘어져 멸망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은 멸망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세상에서 뽑아 내게로 데려왔다, 그런데도 그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도록 그냥 내버려 둘 성싶으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준다.‘“ 라고 하십니다. 제발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영생을 ’줄 것이다‘가 아니라 ’준다‘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최후의 심판 날에 가서야 의롭게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모두 헛소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면 그때 가서도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 영생에 대한 보증이자 담보물, 계약금을 주십니다. 바로 이 땅에서 신자 안에서 거하시는 성령께서 신자가 누릴 내세의 영광에 대한 보증이 되십니다.

세 번째로,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손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붙들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에서 그들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양들에게 집적대는 그 무언가가 항상 있어 왔습니다. 마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소유와 업적에 대한 자랑과 같은 것들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악다구니를 합니다. 오, 형제들이여! 혹여 이러한 욕망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으러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것들의 노력을 돕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라. 내가 너희들의 거처를 준비하러 천국으로 가노라.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요14:2,3) 형제들이여, 여러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일이 아니라면, 제 기운이 너무 빠지는 일만 아니라면 여러분에게 기뻐 뛰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도의 견인을 이보다 확실히 보여 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새삼 성도의 견인 교리를 거세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들도 좋은 사람들일 텐데 그런 분들에게는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어차피 구원받을 거면 굳이 선하게 살려고 발버둥칠 이유가 뭔가?“ 맙소사! 그것은 이 교리를 악용한 사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훌륭한 음식이 앞에 있는데, 투정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같이 먹지 않을 생각입니까? 그러나 형제 여러분, 이 본문 말씀에 의거해저는 저의 모든 염려와 사랑하는 친구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의 양들을 사랑하는 데 실패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의 손길에 내맡길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런던의 저편 끝에서 이곳으로 오면서, 제가 마치공개 처형이라도 받으러 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차가 막 도로를 꺾어 갈 때 여러분이 이곳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보니 제가 마치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차에서 나와 가운을 입을 때에는, 옷 입는 것이 마치 그리스도를 위해 공개적으로 처형당할 준비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한 가지 소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음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하나님이 아시고 거룩한 천사들도 압니다. 저는 여태껏 교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고, 벤슨 주교님이 친절히 보살펴 주셨습니다. 벤슨 주교님은 제가 스물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구를 두 곳이나 맡으라는 제안을 하셨고 가시는 곳마다 저를 동석시키셨습니다. 또 제가 성직자로 안수받을 때 교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여러 곳에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제 안수식에서 벤슨 주교님이 제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저는 하나남의 어린양을 위해 공개적으로 고난받는 자리 외에 그 어떤 자리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런 심정으로 성직자가 되었고, 이런 심정으로 런던에 올라왔습니다.

야곱이 지팡이 하나만 딸랑 들고 시내를 건너는 장면을 읽을 때면, 제게는 지팡이는 물론이고 친구 하나 없이 집을 나와서, 친구하나 없이 옥스퍼드에 갔고, 몸종도 없었고, 저를 소개시켜 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저를 일으켜 세우사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선포하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저는 지금까지 사역을 계속하고 있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런던에 있는 두 예배당(휘트필드는 런던의 무어필즈와 토터넘 코트 로드에 ‘장막’ 이라는 교회 두 곳을 세우고 돌보았다)의 회중들 모두가 제게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제게 예배당을 두 곳 세우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저를 조지아로 부르셨을 때 저는 런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때는 런던에 있는 교회 대부분이 제게 열려 있었고, 제가 설교할 때면 열두 명에서 열네명이나 되는 경관들이 배치되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들지 못하도록 문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런던에 정착하라는 제안을 수백 번도 더 들었지만 저는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순례자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때와 동일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다시 떠나갑니다.

저는 지금 제게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집에서 나올 때 저는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픔을 참을 수 있도록 저를 도우실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을 도우사 저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저를 복되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겨 드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이 제가 대양을 건너가는 열세번째 여행입니다. 여행은 제 생에서 좀 어려운 여행이 될 듯합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기운은 차렸지만 제 몸은 아직도 쇠약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제게 말할 수 없는 평화를 주십니다. 이 평화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제 영혼을 맡겨 드립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 이렇게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 휘트필드를 지켜 주십시오. 아무도 그를 당신의 손에서 빼앗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여행을 하는 도중에 제 앞에 많은 시험이 닥칠 것입니다. 저는 여행 중에는 언제나 사탄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제껏 저를 지켜 오신 하나님이 이번에도 저를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런던에 있는 두교회를 모두 잘 정리하고 떠날 수 있는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아무도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제가 저 자신을 위해 파당을 만든 적이 있다면 여러분이 준엄히 꾸짖어 주십시오. 제가 한 번이라도 여러분에게 다른 훌륭한 목회자에게로 가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그랬다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항상 모든 사람들의 심령을 강하게 할 수 있도록 저를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들 중 몇몇은 후에 제게 가르침을 들은 사실을 부인했지만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셔서 제게 힘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사 제 기운을 소생케 하셨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계속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우시기 원합니다. 제가 만약 저 바다에서 익사한다 해도 물에 빠져 들어 가는 그 순간에도 저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런던을 돌보아 주십시오. 제 친구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아무것도 그들을 당신의 손에서 빼앗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기 때문에, 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는 제가 런던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주님께로 갈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제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여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우리는 헤어지겠지만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에게 일일이 인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과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저 자신을 추스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모든 헤어짐이 끝나고 모든 눈물이 우리 눈에서 씻겨질 것입니다. 지금 저와 헤어지는 이 자리에서 우는 분들 가운데 심판 날에는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양떼 가운데 속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여러분을 데리러 오시기를 원합니다. 제발 오십시오. 오십시오. 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영생을 얻는 축복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서둘러 오십시오. 선하시고 위대하신 목자께서 지금 여러분의 영혼을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 여러분이 지금까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지금 듣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떠나기 직전에 제가 전한 이 고별 설교로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 설교를 통해 여러분이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 그리고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게 이별을 고하기 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설교가 여러분에게 고별설교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발 오십시오! 오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오십시오! 오늘 이 시간 저는 오직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귀한 양들인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키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리스도 가까이에 두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돌보는 인간 목자가 누구인지는 개의치 않습니다. 여러분을 돌보는 인간 목자가 누구인지는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영혼을 돌보시는 큰 목자이시며 주교이신 예수님의 보살핌 아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그 얼굴 빛을 여러분에게 비추시며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 원합니다.(민 6:25,26).아멘.

 

□ 휘트필드가 전한 복음

 

휘트필드의 임종을 맞아 고인을 애도하며

-R. 엘리엇(주석 9 : 엘리엇(R. Elliot); 휘트필드의 초기 사역을 통해 회심한 엘리엇은 나중에 저명한 사역자가 되었고 휘트필드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고(故) 휘트필드 목사님은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편협하거나 옹졸하지도 않았습니다. 고인은 각 사람의 처지와 입장, 예배의 형식에서 오는 차이, 이름, 국적, 의견의 차이를 초월하여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위대한 근본진리에 대한 열정과 확신만큼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한결같았습니다.

생애 말년에 가서는 고인이 복음의 중요한 요점 가운데 일부에 대한 견해를 달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인을 비판했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러한 주장을 신뢰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복음에 대한 고인의 견해는 오직 출판된 글을 통해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고인은 강단에서건 지면에서 건 자신이 전한 복음 가운데 그 어떤 부분도 부인하거나 모호하게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사역 초기에 선포하고 지켜 냈던 복음의 원칙들을 확신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나의 친구 휘트필드 목사님이 평생토록 선포하고 부르짖었던 위대한 복음의 진리들을 여러분과 함께 짚어 보려합니다. 고인이 믿고 가르쳤던 교리들은 우리 역시 주목하여 굳게 붙들어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에 합당한 거룩한 실천이 없어도 그 교리들이 구원을 보장해 준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의 믿음은 가장 거룩한 믿음이고, 복음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를 경건함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누구나 자신이 받아들이는 원칙에 따라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건전치 못하고 이지러진 교리를 지닌 사람이 건전한 생각을 갖거나 거룩한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율법폐기론자(그리스도인은 중생하여 거룩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는 악한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은연중에 구원에 대한 기대를 드러냅니다. 자유의지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뜻대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크고 작은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시고 마침내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생각과 노력과 행동이 그쪽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휘트필드 목사님은 위와 같은 양극단의 위험을 모두 피했습니다. 고인이 가르친 위대한 복음의 교리들은 원죄, 중생,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 성도의 견인(주석 10 : 堅忍, Perseverance;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선택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잃지 않는다(요10:27~29, 롬8:35~39, 빌1:6참조).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한다는 이 교리의 취지를 살리자면 견인보다는 ‘보존’(preservation)이 더욱 정확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을 ‘보존’하시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편에서 본다면‘인내’하는 것이다.-옮긴이.)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선택 등입니다. 저는 고인이 처음 세 가지, 즉 원죄와 중생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믿고 가르친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아주 달랐다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인이 가르친 것과 동일한 교리들을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몇 가지 용어 정의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먼저, 고인은 원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 교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 전가되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아담의 타락한 본성의 부패가 그의 모든 자손에서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전자로 인해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후자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부패했으며 쉽게 범죄하고 본성적으로 모든 악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롬 5:18)고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창 6:5)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본질상 죄인이며 진노의 자녀입니다. 영국 성공회는 39개조 신앙고백 제9조에서 이 무섭고 충격적인 교리가 참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원죄란 자연적인 방법으로 아담의 후손이 된 모든 사람의 본성에 있는 결함과 부패이다. 이 원죄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서 한없이 멀어졌고, 본성적으로 죄악에 끌리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결함은 아담의 죄가 전가된 것이고, 우리의 부패와 죄악에 끌리는 성향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본성의 타락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전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결함은 아담의 죄가 전가된 것이고, 우리의 부패와 죄악에 끌리는 성향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번성의 타락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전해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따라서 성경의 중생(重生)교리는 인간의 이러한 비참한 처지에 꼭 필요하며, 타락한 인간의 구원받는 데에 너무나 유용합니다. 고 휘트필드 목사님은 중생이 구원받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내내 가르치고 강조했습니다. 이 교리에 대해 우리주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그 절실한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 갈 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이해력이란 본성적으로 어둡고, 의지는 완악하며 반역하고, 마음은 완고하고 냉혹하며, 애정은 정욕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육신의 생각은 모조리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그러니 중생이라는 이 전적인 변화는 ‘새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본성적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아무리 세련된 교육과 예절로 정화시킨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휘트필드 목사님은 중생에 대해 가르칠 때, 본성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고 그럴 뜻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불합리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타락한 현재 상태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상태가 바뀌려면 마음과 의지가 변화해야 하며 새 창조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회심을 이룰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회심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휘트필드 목사님은 또 죄인을 회심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임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고, 중생의 교리를 진심으로 믿는 양 설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진 변화는 고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성경적인 중생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세번째로, 휘트필드 목사님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교리를 끊임없이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해 주는 의는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교리를 믿는다면서도 이 가르침을 한사코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휘트필드 목사님은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며 또 우리의 선행으로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할 때에는, 죄인에게 칭의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근거로서 언제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만 가리켰습니다. 절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베푸시는 값없는 은혜의 자리에 올려놓거나, 우리의 믿는 행위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를 너그럽게 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의’(extra nos,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이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를 강조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표현), 다시 말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와 다르게 말하는 자는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 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인이 주장한 바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그리스도의 완전하고 확실한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신자들에게 전가되어 그들을 의롭게 한다.

(2)원죄와 아담의 불순종이 전가되어 우리가 타락하게 되었다는 성경의 교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3)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의를 전가시킴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의롭게 여기기 원하셨다.

 

이와 같은 주장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면 사실상 아담의 범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사실을 부인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순종은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것이 아니요 그들이 한몫 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전가 된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를 의롭다 하는 의와 신자를 거룩하게 하는 성결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합니다. 신자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저는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모든 율법에’순종하심으로 얻은 것이며, 그 순종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반면에 성결은 성령께서 우리 본성을 새롭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거룩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의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면, 성결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다시 말해 의는 전가되는 것이며 성결은 전달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성결을 전가 받아 거룩해진다거나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여 의로워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갱생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로 더불어 교통하심으로 우리에게 내재한 오염과 부패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해방시키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밖에서 완성되어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순종 사역이, 아담의 죄로부터 전가된 죄책과 정죄함에서, 또 우리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의롭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우리의 보증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을 지키시고 고통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값진 축복과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후5:21,롬10:4) 네 번째로, 휘트필드 목사님은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을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성도의 견인은 참으로 그들의 자유의지나 굳은 믿음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 덕분입니다.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도록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 고인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를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이를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되, 거기에는 결코 예외가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EH한 이러한 측량할 수 없는 큰 은혜와 축복이 비참한 죄인들에게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고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을 기쁘게 여기셨음을 알게 되었고 또 그것을 믿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5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뜻하시는 대로 이루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인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영원하신 선택이라는 성경의 교리를 믿고 가르치며 또 고수했습니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주석 11 : 엘리엇이 여기서 말하는 편지는 ‘값없는 은혜’라는 주제를 논한 존 웨슬리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휘트필드가 1740년 12월 24일에 쓴 이 편지는 Whitefield's Joumals에서 재출간 되었다.) 고인은 가장 설득력 있고 유익하며 덕이 되게끔 이 교리를 설명했고 또 주장했습니다. 물론 선택의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휘트필드 목사님은 결코 이 교리를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교리를 믿지 않고도 은혜의 자리에 설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썩 좋은 일은 못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택의 교리에는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덕을 세우며 그들을 위로하는 유익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이 교리를 미디 않는 사람은 원죄 또한 제대로 믿을 수 없다고 단언했는데.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교리에 거세게 반발한다면, 휘트필드 목사님은 아마도 그를 미더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 그를 존중하고 존경할 수 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휘트필드 목사님은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존 웨슬리에 대항해 선택의 교리를 주장하면서, 그 교리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가장 그럴듯한 반론들을 검토하고 그 답변을 제시합니다. 맨 처음 반론은 이 교리 때문에 사람들은 과연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 의심하게 되고 절망적인 두려움에 빠져 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고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의심하게 한다는 것은 중생의 교리도 마찬가지라네. 하지만 사실 그러한 의심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며 선택하셨다고 확신하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되지 않는가? 이것이 내가 선택의 교리를 흠모하고, 그 교리를 복음 사역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확신하는 이유 중 하나라네. 선택의 교리에는 불신자들이 그대로 불신 상태에 안주하지 못하게 일깨우는 힘이 있어. 그래서 육신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소리 높여 반대하는 것이라네. 반면에 보편속죄설(Universal Redemption,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택한 자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받을 진노를 대신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설)은 안타깝게도 불신자를 영적 혼수상태에 안주하게 만드는 개념이야. 그러므로 그토록 많은 자연인들이 보편속죄설을 흠모하고 성원하는 것이지.” 참으로 고인은 이 주제에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선택의 교리만큼 고인이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낱낱이 다룬 교리도 없을 것입니다. 고인의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 용기를 내어 선택의 교리에 대한 많은 반론들을 검토하고 반박한 이 편지를 다시 출판한다면,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중요한 교리에 대한 간결하고 분명하며 탁월한 변호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선택의 교리야말로 참된 신자들에게 가장 편안한 안정감을 주며, 그와 반대되는 교리는 해로움과 고통만 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편지 18쪽에서 고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신하지만 내일, 아니 영원토록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확신도 없다네. 그것은 믿는 자로서 누리는 특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짐이요 불행이 아니겠나. 나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사랑을 깨닫게 해 주셔서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충실함에 의지하지 않고,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굳건히 서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네.

보편속죄설은 한 영혼이 구원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가르쳐 오히려 그를 영원한 암흑에 그대로 남아 있게 만든다네. 피조물이 영생의 소망을 자신의 자유의지에 둔다는 건 너무나 위태로운 일 아니겠나! 죄에 빠지거나 유혹에 넘어질 때마다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니 말일세.”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과 선택의 교리가 나태함과 방종을 조장한다는 반론도 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인은 그러한 생각 역시 단호히 거부하고 부정했습니다. 자신과 여러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경험을 근거로, 오히려 그와 반대라고 대담하게 주장 합니다.

“선택의 교리는 내가 선행을 하게 하는 주된 자극제라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할 수 있네. 내가 편안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교리 덕분이지. 이 교리는 내게 구원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능력을 베푸시는 날,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고 나를 사용하셔서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곳에서 택함 받은 자들을 당신께로 오게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라네.” 하나님의 사랑이 저를 강권하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면, 저는 저를 향한 그 사랑이 얼마나 기껍고 위대하며 불변한지 진심으로 깨닫고 믿게 될 것입니다. 또한 참으로 기꺼이 그분을 높이고 섬기며 그분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제 마음이 넓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보편속죄설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자기의’라는 본성적인 바닥에 안주해 보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선택의 교리에 따른다면 인간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으면, 설교가 무용해지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습니다. 휘트필드 목사님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답변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지 않겠는가?” 선택의 교리가 거룩한 삶을 방해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답변합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이 말했던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에서 나오는 선택 외의 다른 선택을 가르친 사람이 있었는가? 없네. 정말 없다네. 선택의 교리를 전하는 설교자들은 한결같이 성결이 선택의 표시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의 교리가 성결한 삶을 해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선택의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편속죄설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그들은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육체로 마치게 되며(갈3:3)자신들의 자유의지 위에 의를 쌓아간다네.” 제 생각처럼 이 말이 성경에 부합하는 진실이라면, 아마도 완고한 보편속죄론자들에게는 너무도 두려운 말일 것입니다. 편지의 뒷부분인 19쪽에서 고인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그리스도께서 멸망할 자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하는군. 그러면서도 그 말이 모든 저주받은 영혼이 지옥에서 건져진다는 뜻은 아니라니, 자네의 주장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나.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면서 어떻게 모두가 구속받았다고 할 수 있냐는 말일세.”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반론 중 하나를 이유로 삼아 모든 아리우스주의자와 소시니주의자, 율법폐기론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보편속죄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죄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전인 수천수백만의 사람들을 지옥불에 떨어질 운명으로 정해 버리는 일은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는 그들의 결정적인 반론(사도 바울도 이러한 반론을 가정한 뒤 단호히 물리칩니다)에 대해 휘트필드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수천수백만의 사람들이 죄나 잘못도 저지르기 전에 지옥불에 떨어질 운명이라고 누가 주장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지옥불에 떨어질 운명으로 정하셨다고 믿는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어떤 사람들을 아담 안에서 타락한 존재들로 여기신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지옥불이 아담의 범죄에 합당한 형벌이라고 여기신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아무잘못도 저지르기 전에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네(존 웨슬리)는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후손에게 전가하신 일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걸로 알고 있네. 그렇다면 아담이 타락하고 그의 안에서 후손들도 함께 타락한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고 당신의 외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시지 않는다 해도 정당하다는 말이 되겠군. 자네가 이 두 가지 사실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원죄를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일세. 그것들을 정말 인정한다면, 자네는 선택과 유기(遺棄)의 교리를 대단히 정당하고 합리적인 교리로 인정해야만 할 걸세.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하신 뒤에 그들 모두를 멸망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이 정당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들 중 일부를 멸망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겠나.

자네에겐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네. 일관성을 지키려면 자네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교리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선택의 교리와 그에 따라오는 거룩하고 의로운 유기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자네가 믿을 수 있건 없건 상관없이 신실하다네.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롬11:7).’” 휘트필드 목사님은 이렇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편지는 30년전에 출판되었으며, 이 안에는 선택의 교리에 대한 같은 논지의 글이 많이 실려 잇습니다. 저는 휘트필드 목사님의 친구나 추종자라 자임하면서도 정작 고인과 고인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생소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어쩌면 오로지 고인의 명성을 등에 업겠다는 불순한 동기에서 고인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인이 견지하고 가르쳤던 진리를 생각해 볼 때, 고인이 세웠던 원칙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진정한 고인의 추종자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유다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유3절)고 했습니다. 휘트필드 목사님은 그 믿음의 도에 선택의 교리가 포함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장 친밀하고 귀하게 여기던 친구 웨슬리의 주장을 사력을 다해 반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이 완하다며 완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전가한 의로 인한 칭의’와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을 부인하는데, 그 오류의 근원은 보편속죄설이라고 고인은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선택의 교리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임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이제 다시 몇 가지 적용을 통해 제 논의를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휘트필드 목사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을 힘써 전한 고인을 사랑한다면, 고인이 우리와 함께 있었을 때처럼 떠난 지금도, 고인에게 들었던 소중한 진리들을 계속해서 굳게 붙들어 고인의 가르침을 분명히 드러내야 합니다. 또한 고인이 그랬던 것처럼 반대자들에게 맞서 그 소중한 진리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휘트필드 목사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가르침,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인은 보편속죄설이라는 비성경적 개념을 비난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과 그 보혈의 공로를 비난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의지하도록 이끌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하고 그 영혼에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보편속죄설을 수용한다면 보편구원론(Universalism), 행위로 의인이 됨,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구원과 같은 똑같이 비성경적인 개념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은혜의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며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으로, 이는 인간이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엡2:9)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여러분에게 전해졌는지, 여러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었던 휘트필드 목사님이 하나님께 자신의 사역을 낱낱이 아뢸 자로서(히13:17)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까? 그랬다면 여러분도 그 들은 바를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늘 기억하여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십시오. 여러분이 그것들을 업신여기거나 멸시하게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토록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의 징벌을 어찌 피하겠습니까?(히2:3).

형제 여러분, 매사에 주의하여 들으십시오. 실제로는 은혜와 믿음과 중생이 아닌데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중심이 부패한 사람들이 꾸미는 교활한 음모입니다. 그대로의 개념과 견해일 뿐 사도들이나 휘트필드 목사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기에 선택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원죄를 제대로 믿지 않는’사람입니다. 이런 이유로 휘트필드 목사님은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교리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선택의 교리와 거룩하고 의로운 유기를 그 결과로 받아들여야하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고인이 다시 한 번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다면, 중생은 인간의 협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인한 영혼의 거듭남이라고 크게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는 의롭다 하신 이를 또한 분명히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복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골1:23). 마음을 은혜로 굳건히 해야 합니다9히13:9). 성경대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면 인간의 자존심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행함은 설 자리가 업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다면 인간의 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면 인간의 능력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받는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부요하심과 하나님의 불변하심, 신실하심과 진실하심 위에 놓여 있기에 확실한 것입니다.

둘째, 휘트필드 목사님은 이러한 복음의 기본 교리가 경건에서 나오는 거룩한 길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쳤습니다. 고인은 자유주의자나 율법폐기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고인이 가진 원칙이나 실천한 바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교리들이 그에 반대하는 주장들보다 성결을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게 이루게 한다고 주장했을 뿐 아니라, 이 가르침들만이 신자들이 올곧고 거룩하게 신앙을 실천하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복음에 순종하여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확증하고 선행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확증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랑과 화평, 성결을 추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을 증명하십시오(딤후2:22).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모든 가르침이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사실과 거룩함을 장려하지 않는 가르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죄를 멸하지 않는 교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가르쳐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딛2:11,12).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십시오(골골3:12,13). 이같이 거룩한 생활과 말을 통해 어떤 은혜를 받았고 또 누리고 있는지 명백히 드러내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헐뜯던 자들이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벧전3:16).

혹여 여러분 가운데 냉담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해 있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 남는 사람(계3:1)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와 처지에 대해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세상 정욕과 세상을 사랑하는 생각이 여러분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몫을 차지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너무 어렵게 여기고 심지어 불쾌해하기까지 하면서, 데마처럼(딛후4:10) 군중들과 함께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을 섬기는 자들을 떠나갑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고 명백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믿음에 계속 거하고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10:22, 24:13; 막13:13).

셋째,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믿음을 담대하게 주장하고 겸손하게 그 믿음을 위해 전심으로 싸웁시다. 우리의 적들은 이제나저제나 우리가 넘어지기만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해를 끼치는 데 모든 전략과 힘을 집중합니다. 뿐만 아니라 힘닿는 대로 성경을 곡해하여 하나님의 진리들을 어지럽히려고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고 합니다(마24:24).

그러므로 그들의 오류에 말려들어 견고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씨름하고 싸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교리를 순순히 포기하거나 얌전히 빼앗길 것이 아니라,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완강히 저항하고 집요하게 싸워야 합니다.

믿음이 없거나 약한 사람들은 그러한 싸움을 피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것에 반대하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기껏해야 그들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입니다. 만약 휘트필드 목사님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결코 가장 친밀한 친구 존 웨슬리의 오류에 맞서 그처럼 대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더라면,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같은 서신서 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류들이 생겨날 때, 그것을 주창하는 자와 지지하는 자가 누구이든 거기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은혜에 대한 교리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고 부수적인 것이라고 둘러대는 말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십시오. 전 세대에 걸쳐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사안이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관한 차이라면 정말 중대한 문제입니다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법입니다(갈5: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배운 교훈을 거스르고 분열을 일으키며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가 아니라 자기 뱃속만 채우려는 자이며, 그럴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는 자입니다(롬16:17,18). 어떤 시대든 하나님의 교회에 문제와 피해를 일으킨 가장 크고 위험한 오류들은 바깥에 있는 공인된 적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내부의 친구들로부터 생겨났습니다.

사도 시대에는 율법폐기론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두 부류 모두를 정죄했고, 그들을 경계하라고 교회에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율법주의자들을 조심해야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우정과 성결과 사랑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외관상 의로운 일군들이기 때문입니다(고후10:2).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고지식하고 나약하여 그들의 잘못된 의견들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넷째, 고인을 따라갈 준비와 각오를 합시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참으로 이 나라에, 이 교회에 언제라도 심판을 내리실 듯합니다. 지금 이 나라 곳곳에 불결함과 불경스러움, 불신앙과 사치에 압제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빨리 우리에게 부어질지 아닐지 분명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과 전염병이 바로 우리 앞에 와 있고, 그보다 거 큰 심판인 식량의 기근과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뒤따라 온데도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말씀의 기근이 가장 뼈아픈 심판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지만 겸손해지거나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더욱 완고해지고 점점 더 나빠져만 가는 듯합니다. 지진과 역병으로 입은 상처는 잊어버리고,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악해진 자신의 모습에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대답하게 계속해서 죄를 짓고 더욱 완고해집니다.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을 내리지 않으시니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죄를 짓습니다(전8:11).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폭풍이 지연될수록 정작 그것이 도래했을 때에는 그 강도가 더욱 거셀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에 다 이루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삼상3:12). 자비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대하고 사람들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과 진노가 그들을 사르고 파멸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영국이라는 이 메마른 나무는 하나님께 최악의 심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교회를 체로 쳐서 시험하시고 깨끗하게 하실 것 같습니다. 지금 미묘하고도 위험한 오류들이 우리 가운데 널리 퍼져 있습니다.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관심하고 삶은 나태하기만 합니다. 여러분이 그 오류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열심을 다해 그 물결에 꾸준히 대항해야 합니다. 모든 오류에 끊임없이 저항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오류에 잠식당할 것이고, 이것은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그러한 오류들을 자기도 모르게 승인했다는 표시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들이여, 여러분 자신의 부패함에 군림당하지 않으려면 거기에 대항해 끊임없이 감시하고 기도하고 저항하고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교만한 자아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끌어내리는 오류에 빠진 교리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여러분의 성결에 대한 의무감을 약화시키고, 성결을 실천할 마음과 힘까지 모두 빼앗아 버릴 것입니다. 건전한 교리를 굳게 붙들지 않으면 절대 거룩한 습관을 계속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십시오(딤전6:12).

다섯째, 여러분은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엡5:1,2). 그리스도인이 나누는 진정한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목적이자 율법을 성취한 것이며 은혜를 받고 회심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올바른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만사를 엉터리 이름으로 부릅니다.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이 오직 복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한 사랑이 되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해야 마땅하지만,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사랑만이 진정한 회심을 증명해 줍니다. 이 사랑은 그 어떤 집단이나 이름, 교파에 한정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정녕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는 사람을 보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룩한 기독교의 방식을 좇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힘써 사랑하십시오.

하지만 아무도 엉뚱한 것에 사랑과 솔직함과 자비라는 이름을 붙여 여러분을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의도를 숨기기 위해 그 이름들을 빌려 쓰지만 은혜는 내팽개쳐 버립니다. 아리안파와 소시니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온유와 사랑, 친절과 자비를 외쳐 대면서 우리를 속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의 눈을 가려 자신들의 이단사설을 분별하고 물리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자유의지에 안착하는 사람들이 꾸미는 교활한 음모이기도 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갚는 데 아무런 효력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그러한 무서운 오류로부터 지키시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부디 그리스도의 사랑을 좇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계속해서 성도들간에 서로 화평을 끼치고 덕을 세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섯째, 우리가 믿고 선포하는 선택과 예정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죄인들을 낙담케 하거나 그들이 회심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은밀한 명령이나 뜻을 따로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청이요 부르심이며 명하심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선택받은 자인지 증명하거나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복음에 순종하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올바른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선택받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죽을 죄인임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죽음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저주를 받는 사람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를 못 본 체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 생명을 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는 쪽이건 거절하는 쪽이건 사람들이 자기 뜻과 달리 억지로 강요받거나 내몰리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선택한 대로 계속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반면에 택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죄와 그 본성이 위험함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유일한 길임을 보여 주셔서 그들이 그리스도께 기꺼이 오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유롭게 기꺼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믿음으로 붙들어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선택받았음을 입증합니다. 진정한 신자는 모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선택의 열매이자 결과입니다. 반면에 끝까지 죄와 불신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의 수에 속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정당하다고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어느 분도 무지하여 이 가르침에 실족하는 일 없이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지른 죄가 아무리 흉악하다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영원한 영광으로 안전하게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3:14, 요6:37).

설령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여러분은 선택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가 봐야 그분이 여러분을 받아 주거나 구원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매몰차게 거절하고 쫓아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9:33)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금 들으신 대로 여러분이 그분에게 나아가면 결코 내어 쫓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죄인들에게 차별 없이 풍성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선지자가 증언하기를. 그 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고후5:20,21 행10:43참조).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휘트필드 목사님을 따라 우리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그리할 때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천국을 믿음과 인내로써 상속받은 사람들을 따라 머지않아 그들과 함께 거하고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히6:12).우리는 천국에서 더 없이 기뻐하며 우리가 구원받은 모든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과 어린양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께 영원한 영광이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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