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치범 수용소, 그 참혹한 현실!
“해외동포 포섭기관인 노동당 제824연락소내 통정부는 정치적 다단계”
◇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 오길남 박사와 북한인권단체 회원들이 지난 9월 2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신씨와 두 딸의 송환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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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덕수용소에서 신 씨 모녀는 항상 머리를 푹 숙이고 다녔어요. 대인기피증이 있는 것처럼 말수도 없었어요. 딱 한번 큰딸 혜원이가 ‘아버지 때문에 들어왔다’며 원망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선노동당 제824연락소 내 통정부라는 곳이 해외동포 포섭기관입니다. 한명을 잡아오면 그 사람이 두명을 잡아오는 식이니 정치적 다단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독에서 유학생과 간호사로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오길남·신숙자 씨 부부는 1985년 ‘북한행’이란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다시는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당시 11세 9세이던 두 딸은 아버지가 떠난 이후 30대 중년이 될 때까지 요덕수용소에서 청춘을 보냈다.
때리는 것 외 수감자를 굶겨 죽이는 것이 정당화되어 있는 그곳에서 신숙자 씨(69)와 두 딸 혜원(35)·규원(33) 씨는 전향을 거부한 채 지금까지도 정치범으로 남아 있다. 남편 대신 지옥에 남기로 결정한 신 씨는 “딸들을 가증스러운 범죄 공모자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말로 남편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이들의 요덕수용소 삶을 증언해주는 탈북자 정광일 씨(48), 김수철 씨(가명, 43)는 한국에서 산지 수년째인 지금도 수용소에 잡혀가는 악몽을 자주 꾼다고 했다.
간첩으로 몰려, 남한방송 듣다가 수용소행
중국에서 한국사람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정 씨는 중국에서 태어나 살던 중 1968년 문화혁명 동란으로 아버지가 북한간첩으로 몰리면서 탄압을 피해 들어간 곳이 북한땅이었다고 고백했다.
1999년 보위부에 끌려가기 전까지 조선평양무역회사 청진지사장으로 근무했던 그였지만 무차별 구타와 끔찍한 고문이 가해졌다. 5㎝ 굵기의 각목으로 마구 두들겨 맞아 뒤통수가 깨져 지금도 세 군데 상처가 있고, 그때 이가 모두 부러져 중국에서 치료를 받기까지 4년을 치아 없이 살아야 했다.
“보위부에선 맞고 조사받고 맞고 조사받는 일상이 반복됐어요. 쇠창살에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잠도 못 자는 ‘비둘기 고문’을 당하는 동안 체중이 75㎏에서 35㎏까지 줄기도 했고요. 화장실도 보내주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용변을 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9개월간 조사를 받는 동안 함께 잡혀온 2명의 수감자가 죽고 혼자 살아남은 정 씨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시인하기 시작했다. 죄를 거짓으로 시인한 뒤 재판도 없이 요덕수용소로 보내진 다음에는 인간 이하의 노동에 시달렸다.
1992년 군복무 중에 남한방송을 듣다가 요덕수용소에 수감된 김수철 씨는 “지금은 대부분 북한주민들이 남한 소식을 알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처음 접하는 남한방송이 신기해 몰래 듣다가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처음 감방에 따로 갇혀 8개월간 조사를 받을 때 잠 안 재우고 밥 안 주고 구타하는 것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후 김 씨는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한 김호석·최광호 씨가 공개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
김 씨에 따르면, 2000년 수감된 김철민 씨(35)는 수용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욕하다 보위부원에게 끌려간 뒤 비밀 처형됐다는 얘기가 돌았다. 2000년 1월 회령시 보위부 구류장에 있을 때 기독교를 접했다는 이유로 잡혀온 안권순(29) 씨는 구타와 고문에 시달리다 거의 죽게 됐지만 담당 보위부원이 방치해 끝내 숨졌다.
김 씨는 수용소에서 가장 심한 경우는 공개처형보다도 못한 비밀리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죄목을 읽어주는 것조차 꺼릴 때 택하는 방법이다. “사무실로 불러올려 한 사람은 앞에서 담배 한 대를 주는 척하다가 방심한 사이 다른 사람이 뒤에서 망치로 머리를 쳐서 한방에 죽이는 방식입니다. 김정일을 욕하거나 남한에 대해 좋은 말을 퍼뜨린 최악의 경우가 해당되지요.”
“힘든일 시켜 작업량 못채워 굶기면 보름 못 넘겨“
요덕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주로 북한에서 큰 사건에 연루되거나 체제를 비판한 독일이나 중국 등지의 유학생, 말로 반동을 저지른 정치범들이라고 한다. 정치범들은 일반범과 달리 오랜 유치장 생활과 구타 등으로 허약할대로 허약해 제대로 운신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수용소의 하루는 아침5시에 기상해 간단히 세수하고 밥을 먹고 6시부터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밥이라고 해봐야 옥수수에 두부콩을 넣은 밥 한그릇에 소금으로 간을 맞춘 시래기국 한그릇이 전부이다. 김 씨는 “수용소 안에는 전에 잘 살던 사람들도 많이 온다. 그러니 이런 음식을 먹고 소화를 못 시켜 더 아픈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감자들은 6시간을 일한 뒤 12시에 점심밥을 먹고 다시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7시간 작업을 한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도 밤11시까지 당의 유일사상 체계 10대 원칙을 학습해야 한다. 그냥 학습이 아니라 그날 과제를 다 외우지 못하면 잠을 안 재우니 바로 고문이다.
정 씨는 “수용소에서는 누군가를 죽이려면 하기 힘든 일을 시켜 하루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게 한다.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식량배급을 주지 않으니 결국 체력저하로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보통 보름을 못 넘기고 죽는데, 허약해서 죽은 것이지 맞아 죽은 것이 아니니 합법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다 보니 아버지가 아들 밥을 뺏어 먹는 곳이 바로 요덕수용소”라고 했다.
대개 영양실조로 배가 고파서 죽어나가는 수감자들은 인분을 먹고 대장염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4월부터 옥수수 농사를 짓는데 파종을 파면서 수감자들이 종자를 훔쳐먹는 경우가 생기니까 종자에 인분을 버무려서 줍니다. 배가 너무 고픈 수감자들이 이것을 조금씩 훔쳐 물에 씻어먹고 대장염에 걸려 죽는 일도 허다하지요.”
정 씨는 “가장 힘든 일은 겨울철 나무 끌기로 직경 30㎝ 길이가 4m 이상인 나무를 한 사람이 4㎞ 거리를 4번 끌어야 하루일이 끝난다”며 “이 때문에 사고를 많이 당하고 결국 작업량을 수행못해 배급을 못 받으니까 영양실조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했다. “선착장에 옥수수떡을 놓고 제일 많이 나르는 수감자에게 상을 준다고 하면 서로 밀치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죽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를 재미있다고 보면서 구경거리로 삼는 보위원들이 있는 곳이 북한의 현실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널빤지로 대충 관을 짜서 그냥 묻으면 1년이 지나 팻말도 없는 묘지는 그대로 잊혀진다”고 말하는 정 씨는 그동안 유엔 등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북한인권문제를 알리던 노력을 신 씨 모녀 송환에 쏟고 있다. 그는 “탈북자라는 신분으로 소외층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있는 일에 남은 삶을 바치고 싶어 이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데일리안 = 김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