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강제수용소에서 7년 간 고초를 겪은 뒤 탈북한 이순옥 (52)씨가 파리의 메종 드 라디오 프랑스에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증언했다. 함경북도에서 당간부 전용 물자 공급소장을 지낸 이씨는 지난 85년 경찰간부의 뇌물 요구를 거절한 뒤 정치범으로 몰려 인민 재판에서 13년형을 선고받고 평남 개천 교화소에서 92년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가 94년 아들과 함께 중국을 거쳐 탈북에 성공했다.
탈북자 이 순옥 여사의 프랑스 라디오 증언입니다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다음은,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 선고까지 받고 사형 집행날이 되었을 때, 극적으로 사형을 취소한다는 통지를 받고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을 때 수용소 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 여명이 수용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 지휘와 모든 재정 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를 담당하고 있던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는 단단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 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곳에
가야 된다. 그리고 그 미친 자들하고는 절대 눈 길 한 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 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 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기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 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들이 잡혀 왔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 여섯 시간, 열 여덟 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또 떨어지고, 타 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제가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 안이 쥐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백 명의 그 죄수 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 소리 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 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 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백 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 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 명을 끌어 내다가 땅바닥에 엎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 하나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로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 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뛰던 교도관 두 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면서
달려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서 믿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잡아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도 저렇게 거부하지 않고, 저렇게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개 처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구를 또 공개 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언제나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 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못 보게 하라는 김 일성의 특별 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못 보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꺾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못 보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일어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는 그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 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여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 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함북 회령(5만), 함북청진(1.5만), 함북화성(2만), 함남단천(1만), 함남 덕성(1만), 함남요덕(5만), 자강동신(1.7만), 평북천마(1.5만), 평남개천(1.5만), 평남북창(5천) 등 10개였던 정치범 수용소가 현재 평남 개천의 14호관리소, 함남요덕의 15호관리소, 함북화성의 16호관리소, 함북회령의 22호관리소, 함북청진의 25호관리소 등 5개로 통폐합되었으며, 전체 수용인원이 약20만명에 이른다. 재판절차도 없이 참혹한 학대를 받는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다. 현 정치범수용소에는 적게는 6000명, 많게는 10만명의 기독교인이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